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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은 보수를 구하지 않는다

김범준 공공정책연구소 대표

입력2026-05-29 10:40

김범준

김범준

공공정책연구소(IPP) 대표

팬덤정치보다는 균형과 대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AI 이미지.
팬덤정치보다는 균형과 대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AI 이미지.

2026년 봄, 한국 보수정당은 다시 낯익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총선 패배, 조기 대선 패배, 지도부 책임론, 혁신위원회, 쇄신 구호.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의식이다. 그러나 시민은 정치인보다 빠르게 이 반복의 허망함을 알아차린다. 같은 말이 반복되고, 같은 사람이 남고, 같은 방식으로 책임이 흐려질 때 정당의 위기는 선거 패배가 아니라 학습 능력의 상실로 바뀐다.

이번 위기를 두고도 두 진단이 맞선다. 한쪽은 더 강하게 싸우지 못해 졌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강성 지지층에 끌려가 중도를 잃었다고 말한다. 둘 다 일부는 맞지만 충분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정당은 열성 지지층의 박수와 분노를 민심 전체로 오해하게 되었는가. 왜 정당 안에서는 크게 들리는 목소리만 정치적 현실이 되고, 조용히 떠나는 유권자의 신호는 뒤늦게야 패배로 확인되는가.

정치학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설명해 왔다. 정당의 열성 활동가와 조직화된 지지층은 일반 유권자보다 더 강한 신념과 더 높은 참여 의지를 가진다. 이들은 당비를 내고, 경선에 참여하고, 후원금을 모으고, 온라인에서 여론을 형성한다. 정당정치에서 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동력이다. 문제는 이 동력이 정당의 방향타까지 장악할 때 생긴다.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일반 유권자를 설득해야 하지만, 내부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조직화된 지지층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 간극이 커질 때 정당은 사회의 다수보다 당 안의 소수를 더 크게 듣는다.

팬덤 정치의 본질은 열성 지지자 자체가 아니다. 민주정치에서 열성 지지자는 자산이다. 정당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는 시민은 정치의 냉소를 막는 귀한 존재다. 그러나 그 열성이 정당의 판단 기준을 독점하면 자산은 위험으로 바뀐다. 누구의 말에 박수가 쏟아지는지, 어떤 표현에 항의가 몰리는지, 어떤 태도가 ‘배신’으로 낙인찍히는지 정치인은 빠르게 학습한다. 처음에는 현실적 계산이다. 그러나 그 계산이 반복되면 정당은 더 넓은 시민을 설득하는 능력보다 내부 비판을 피하는 기술에 익숙해진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조용한 유권자의 목소리다. 법치, 안보, 재정 건전성, 시장경제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과격한 언어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현 정부·여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보수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에는 망설이는 사람들. 이들은 보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수가 다시 설득해야 할 시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댓글창에서 싸우지 않는다. 문자폭탄을 보내지도 않는다. 지역 조직을 흔들지도 않는다. 다만 한 걸음 물러나고, 침묵하고, 결국 투표장에서 다른 선택을 하거나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정당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큰 비판이 아니라 조용한 거리두기다. 공격의 비용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다. 문자, 댓글, 당원 게시판, 지역 조직의 반발, 경선 불이익은 정치인에게 당장 압박으로 다가온다. 반면 이탈의 비용은 늦게 드러난다. 다음 여론조사에서, 다음 선거에서, 혹은 패배 이후의 분석 보고서에서야 확인된다. 그래서 정당은 당장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조용한 이탈을 반복해서 감수한다. 그 회피가 누적되면 정당의 체질이 된다.

팬덤 정치가 더 위험한 이유는 정당을 가치와 노선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물 충성의 공동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내부 비판이 자정의 신호가 아니라 배신으로 읽히는 순간, 문제를 먼저 말한 사람은 고립되고 침묵한 사람은 안전해진다. 겉으로는 단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진단 능력을 잃은 조직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충성으로 묶인 정당은 그 인물이 흔들릴 때마다 함께 흔들리고, 그 인물이 사라질 때마다 내전을 치른다. 정당은 오래가야 하지만 팬덤은 대개 특정 인물의 정치적 운명에 묶인다.

따라서 보수정당의 쇄신은 구호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여야 한다. 팬덤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열성 지지층 없는 정당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그 에너지가 정당 전체의 판단을 대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원 의사와 일반 국민 여론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당론 결정 과정에서 숙의와 책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공천 심사에서 확장성과 자질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혁신은 선언문이 아니라 절차에서 증명된다.

보수정당이 다시 넓어지려면 먼저 자신에게 박수 치는 사람과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정당의 엔진이다. 그러나 후자 없이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정당은 엔진의 열기로 움직이지만, 방향을 정하는 운전대는 더 넓은 시민의 신뢰여야 한다. 박수받는 말만 반복하는 정당은 내부에서는 뜨거울 수 있어도 사회 전체를 설득하지 못한다.

지금 한국 보수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넓은 귀다. 열성 지지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열성이 정당의 기준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내부의 불편한 질문을 배신이 아니라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 당장의 분노를 피하려 조용한 시민을 잃지 않는 것. 보수가 회복되는 길은 팬덤의 열기를 더 키우는 데 있지 않다. 그 열기를 시민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정치로 전환하는 데 있다. 팬덤은 정당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정당을 구하지는 못한다.

김범준 공공정책연구소(IPP) 대표
김범준 공공정책연구소(IP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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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공공정책연구소(IPP) 대표, (사) 행복한출생 든든한미래 사무총장

(전)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국제정치 전공), 부산대 특임교수, 웨스턴워싱턴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리얼미터 부대표

*정치 개혁과 정당 혁신, 저출생과 미래세대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이 칼럼을 통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다음 세대의 기회, 공동체의 실질적 해법을 기준으로 한국 정치와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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