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발묶인 대어들…깐깐해진 심사에 벤처 입성도 바늘구멍
[희비 엇갈린 IPO 시장]
■韓 자금조달 2013년 이후 최저
중복상장 금지에 계열사 IPO 제동
기술평가 때부터 수익성 증명 필요
일부 혁신기업 해외로 눈돌리기도
올해 조단위 상장기업 케뱅이 유일
하반기 시장판도 바꿀 유니콘 부재
입력2026-06-02 17:30
수정2026-06-02 23:37
지면 3면
“연초까지 불어오던 공모주 랠리가 사라졌습니다.”
올해 기업공개(IPO) 시장에 불어든 찬바람을 두고 정부 정책이 진통을 겪으면서 빚어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가가 우상향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대기업 자회사 상장을 막고 우량 기업 유치에 나섰지만 정작 자금이 절실한 혁신 기업들은 배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재무적투자자(FI)들의 엑시트 창구도 덩달아 좁아지면서 자본시장 내 투자·회수 사이클 전반에 악순환이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21곳의 기업이 상장해 약 1조 474억 원을 조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IPO 암흑기로 꼽히는 2013년(91곳, 1조 3096억 원) 이후 처음으로 연간 상장 건수와 공모 규모가 각각 100곳, 3조 원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코스피 입성은 케이뱅크 단 한 곳에 그쳤고 하반기 시장 판도를 바꿀 대형 주자가 나타날 가능성도 낮게 점쳐진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초 업계에서 예상했던 수준보다 고강도의 중복 상장 규제가 시행되면서 HD현대로보틱스·한화에너지 등 대기업 계열사 IPO가 원천 봉쇄됐기 때문이다. 지난 5년(2022~2026년) 동안 코스피에 상장한 대기업 계열사들은 매년 전체 공모 규모의 20% 이상을 책임졌는데 모회사 주주들로부터 ‘소수주주 다수결(MoM)’에 준하는 강력한 수준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거래소 심사 문턱도 넘을 수 없게 됐다.
자본시장 체질 개선을 지향점으로 제시한 ‘다산다사(多産多死)’ 정책도 코스닥 상장기업 수의 감소로 직결됐다는 평가다. 부실 기업들을 신속히 퇴출해 생긴 공백은 우량 강소 기업들로 채워 증시가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실제로 올해 1~5월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 수(13곳, 스팩 제외)는 최근 5년(2021~2025년) 가운데 가장 적었지만 이 중 8곳의 주가는 여전히 공모가보다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공모주 흥행을 위해 애초 공모가 눈높이를 낮게 잡은 영향이다. 이런 가운데 보다 깐깐해진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한 혁신 기업들도 다수다.
거래소가 코스닥 상장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던 인공지능(AI) 유니콘들은 당분간 내실을 다지거나 해외 상장을 고심하는 분위기다. 최근 상장 전 투자 유치(프리 IPO) 라운드에서 3조 4000억 원에 달하는 몸값을 인정 받은 리벨리온은 연내 상장을 추진했지만 내부 재정비 차원에서 내년으로 순연했다. 퓨리오사AI의 경우 국민성장펀드로부터 8000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았음에도 핵심 피어그룹(비교 기업)인 세레브라스가 나스닥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미국 상장 선택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코스피 역시 올해 2월 상장한 케이뱅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10조 원이 넘는 기업가치로 주목을 받았던 무신사와 구다이글로벌은 당장 올해 상장을 마무리해야 할 만큼 FI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공모 자금이 급박한 상황이 아니다. 기대하는 몸값을 책정받기 위해 올해 연간 실적까지 지켜본 뒤 내년께 본격 상장에 나설 계획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유니콘 기업이자 연내 상장이 점쳐졌던 갤럭시코퍼레이션도 아티스트 지적재산권(IP)을 확대하라는 거래소 피드백에 따라 올해 상장은 쉽지 않게 됐다.
IPO 시장 침체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창구가 막힘으로써 투자와 회수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진다는 문제를 낳는다. 특히 기술력과 성장 잠재력에도 재무구조가 불안정한 탓에 상장 길이 막히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기술특례 상장의 초입부인 기술성 평가 단계에서부터 사업 모델이 갖춘 수익성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통과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하소연이 나온다. IB 업계 관계자는 “기술성 평가를 통과하려면 거래소가 지정한 전문 평가기관 두 곳으로부터 각각 ‘A’ ‘BBB’ 이상을 받아야 하지만 최근 A를 받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며 “통과 확률을 30% 정도로 보는데 역대 가장 낮은 수치일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발행 시장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돼야 자본시장 내 자금 선순환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작 자금 조달이 절실한 기업들이 IPO 기회에서 배제될 경우 상장 후 엑시트를 염두에 두고 투자한 FI들도 난항을 빚을 수밖에 없다. 다른 IB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IPO 건수가 줄어들면 당국 차원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게 했던 반면 요새는 수량보다 상장 후 주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많이 보고 있다”며 “상장의 본질적인 목적은 자금 조달이기 때문에 올해 신규 상장이 급격히 감소한 것을 중대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로써 올해 IPO 시장이 슈퍼사이클에 들어설 것이라는 증권가 전망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는 평가다. 지난해 하반기 증시가 활황을 띠던 시점부터 상장 주관 문의가 급증하자 증권사마다 올해를 업사이클 초입 구간으로 내다봤다. IB 업계 관계자는 “IPO 시장은 통상 4~5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순환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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