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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저널리스트
해적경영학
1532년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은 페루를 중심으로 남미 서쪽 해안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당시 해적에게 알려지지 않아 비교적 안전했던 서쪽 해안 항로가 1579년 3월 피바다로 변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해적선 골든하인드(Golden Hind)가 페루의 리마 연안에 나타나 무차별 약탈을 벌인 것이다. 카카푸에고(Cacafuego) 나포 사건이다. 약탈한 금은보화를 옮겨 싣는데도 5일이나 걸렸다. 지금으로 치면 무려 1,430억원 규모의 해적질이다. 드레이크는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담하게 기습한 뒤 영리하게 추격을 따돌리는 해적으로 유명하다. 브라질 동쪽 해안에서 해적질을 벌인 뒤, 마젤란 해협을 지나 페루 서쪽 해안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간 드레이크는 내친 김에 인도양까지 돌파했다. ‘카카푸에고’로 크게 한 탕 벌인 뒤, 추격을 피하려고 서쪽 항로를 잡다 보니 뜻하지 않게 세계 일주(1580년)까지 하게 된 것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1522년)에 이은 2번째 세계일주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드레이크는 몰래 후원해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알현하고 약탈한 보물을 바쳤다. 지금으로
해적이 도시를 공격했다. 1668년 해적 500명이 모여 스페인이 본국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파나마의 항구를 습격했다. 당시 스페인 식민지 중 요새가 가장 튼튼했던 포르토벨로도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쳐들어오는 해적을 막지 못했다. 3년 뒤 파나마시티도 마찬가지다. 함대 36척과 해적 1,200명이 동시에 바다와 육지로 밀려들어 파나마시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해적 끝판왕’(Buccaneer King) 헨리 모건이 벌인 짓이다. 육지를 공격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다에서 벌인 사략질(私掠-)은 약탈한 물건의 10%를 정부에 바치고, 배를 빌려주거나 투자한 사람에게도 몫을 떼 줘야 한다. 육지에서 약탈하면 그럴 이유가 없다. 계약에 없기 때문이다. 모건은 공격을 시작할 때, 인원이 적다고 불안해하는 해적에게 적을수록 나누는 몫이 크다고 설득했다. 악랄한 전략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성당에서 붙잡은 신부와 수녀를 인질로 앞세워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교가 천주교인 스페인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작전이다. 스페인이 파나마 약탈을 거칠게 항의하자, 1672년 모건은 영국 왕실로 소환돼 조사를 받고 처벌을 기다렸다. 엄청
1716년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이 활개를 칠 무렵, 대형 상선이 카리브해에 나타났다. 당시 최강의 해적 연합함대를 이끌던 벤자민 호르니골드는 해적들의 주장을 한사코 물리치며 상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영국 국기를 달았다는 이유다. 호르니골드는 윤리 기준과 애국심이 강해 스스로 해적이 아니라고 여겼다. 비록 영국 왕의 면허장을 받지 못했지만 사략선(私掠船)을 운영한다고 규정하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같은 적국의 배만 공격했다. 점점 불만이 쌓이면서, 연합함대의 해적들은 총사령관에 대한 신임을 투표에 부쳤다. ‘블랙샘’(Black Sam) 사무엘 벨라미가 추대되고, 호르니골드는 ‘검은 수염’(Black Beard) 에드워드 티치와 함께 연합함대를 떠났다. 1년 남짓 함께 해적질을 계속하던 호르니골드는 1717년 말 의견 차이로 ‘검은 수염’과 헤어졌다. 호르니골드는 영국 왕 조지 1세를, ‘검은 수염’은 전임 앤 여왕을 각각 지지했다. ‘검은 수염’은 ‘앤 여왕의 복수’(Queen Anne‘s Revenge)를 이끌고 떠났다. 18세기 초, 호르니골드는 카리브해의 해적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우두머리
1718년 7월 영국 왕 조지 1세는 신대륙 항로를 위협하는 카리브해의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당시 바하마 나소(Nassau)에서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을 무대로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다. 이 때 해적공화국의 우두머리 벤자민 호르니골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해적이 사면을 받고 해적 생활을 청산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도 사면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해적으로 복귀했다. 처음부터 사면을 거부한 거의 유일한 해적이 바로 찰스 베인이다. 조지 1세의 명령을 받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 찰스 베인은 배 한 척에 불을 질러 나소 항구로 들어오는 총독의 함대로 밀어 보냈다. 사면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신호다. 한 술 더 떠 바로 주변에서 프랑스 함선을 약탈한 뒤 불을 질러 가라앉혔다. 한 마디로 ‘엿 먹어라’는 도발이다. 베인의 해적질은 늘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사방팔방에 불을 지르고 화약을 터뜨려 겁을 주면서, 분노와 광기로 가리지 않고 노략질하는 전형적인 해적이다. 총독과 해적사냥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베인은 상선을 하나 장악한 뒤, 해군이 다가오자 부하들을 약탈당한
1701년 5월 영국 템즈강의 한 항구에서 가엾은 해적 선장이 교수형을 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결박당하고 목은 올가미에 걸린 채 축 늘어져 쇠창살에 갇힌 상태로 죽었다. 향년 47세. 당국은 해적질에 대한 경고로 썩어 문드러져 해골이 드러날 때까지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억울하게 해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가, 가장 유명한 해적으로 부활한 ‘캡틴 키드’(Captain Kidd)라는 애칭을 가진 윌리엄 키드다. ‘캡틴 키드’는 원래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해적질을 하는 사략선(私掠船)을 지휘했다.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의 무역선 ‘콰다르 머천트’(Quedagh Merchant)는 왜 하필 그 때 프랑스 국기를 달았을까? ‘캡틴 키드’는 1698년 ‘콰다르 머천트’를 붙잡아 엄청난 보물을 털었다. 분노한 무굴제국의 협박에 영국은 ‘캡틴 키드’를 해적으로 몰고 대대적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이 때 건 현상금만 해도 2000 파운드(100억원)를 넘었다고 한다. 정치의 세계는 그렇게 비굴한가? 졸지에 해적으로 몰린 ‘캡틴 키드’는 자신을 후원하던 뉴욕 식민지 총독 벨로몬트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려주면 숨
1718년 11월 카리브 해의 윈드워드 해협에서 프랑스 군함과 마주친 해적선 ‘레인저’(Ranger)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공격과 후퇴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다. 투표에 부친 결과 압도적인 차이(76 대 15)로 공격해야 했지만, 선장 찰스 베인은 체급에서 차이가 나는 군함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며 계속 후퇴를 고집했다. 물러난 해적들은 선장을 겁쟁이라 놀리며 찰스 베인을 쫓아내고, 공격하자고 부추긴 존 래컴을 선장으로 추대했다. 래컴은 정말 프랑스 군함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 큰 바다에서 대형 무역선을 상대로 한 탕을 노리는 과감한 해적과 달리, 그는 기동력 좋은 작은 해적선으로 가까운 바다에서 혼자 다니는 작은 어선이나 무역선만 노리는 좀도둑 같은 해적질로 승률을 높였다. 자랑할만한 무용담이 없다. 탁월한 말발로 동료 해적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선장 자리를 꿰차고, 유명한 해적인 것처럼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겉멋만 번지르르한 해적일 터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벨벳을 즐겨 두른 여느 해적 선장과 달리, 래컴은 밝고 화려한 옥양목(Calico)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래서 별명이 ‘캘리코 잭’(Calico Jack
해적이 호화선을 붙잡고나서 배를 서로 교환한 뒤 돌려보내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1717년 2월 ‘블랙샘’ 사무엘 벨라미가 이끄는 해적선 ‘술타나’는 카리브해에서 영국 호화 노예선 ‘위다’를 사흘 동안 뒤쫓았다. 경고사격 대포 한 발에 놀란 ‘위다’는 저항하지 않고 바로 항복했다. ‘블랙샘’은 ‘위다’에 대포를 옮겨 기함으로 삼고, 포로로 잡은 선장과 선원은 ‘술타나’를 타고 떠나게 했다. 해적이 포로를 배려하고 아량을 베푼 드문 사례다. 두 달 뒤 뉴잉글랜드 근처에서 중형 무역선을 나포한 뒤, ‘블랙샘’은 선장에게 해적으로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당했다. ‘블랙샘’은 선량한 선장에게 무역선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반대하자 투표에 부쳐 결국 배에 불을 질러 바다에 가라앉혀야 했다. 못내 미안했는지, 그는 선장에게 변명했다. “그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아”(They scorn to do anyone a mischief, when it is not for their advantage). ‘바다의 로빈후드’로 알려진 ‘블랙샘’이 해적질 하는 방식이다. 따르는 해적들
1720년 6월 캐나다 펀들랜드 남동쪽 트레파시 항구에 검은 ‘졸리로저’(Jolly Roger)를 내건 해적선 ‘로열포츈’(Royal Fortune)이 다가왔다. 검은 깃발은 순순히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신호다. 온 항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정박했던 프랑스 함선과 상선 172척이 두려움에 질려 도망가거나 항복해버렸다. 해적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항구를 장악했다. ‘로열포츈’ 한 척에 60명 남짓한 해적이 타고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검은 남작’(Black Bart)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가장 성공한 해적으로 꼽힌다. 불과 3년 남짓 해적질 하면서 무려 470척이 넘는 배를 약탈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3200만 달러(한화 420억 원)쯤 된다. 노예선을 타다가 해적에게 붙잡혔지만, 뛰어난 항해 실력으로 6주 만에 선장으로 추대됐다. 자신을 배려해 주던 선장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첫 작전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의 섬 프린시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해적이 되기 싫어서 그랬을까? ‘검은 남작’은 흉악한 해적이 아니라 멋진 신사처럼 보였다. 화려한 진홍색 코트에 다이아몬드 십자목걸이를 걸
17세기말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695년 순례자와 보물을 실은 황제의 호화무역선 ‘간지사와이’가 홍해에서 인도로 가다가 해적들에게 어이없이 약탈당했다. 무역선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넘치는 보물’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많은 보물을 싣고 있었을까? 지금으로 치면 일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보인다. ‘롱벤’(Long Ben) 헨리 에브리는 다른 해적선 5척을 끌어들여 사상최대의 약탈작전을 지휘했다. 동참한 해적선장 토마스 튜가 전투하다 죽으면서 다른 해적선들이 머뭇거렸지만, ‘롱벤’은 해적선 ‘팬시’를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100명 남짓한 ‘팬시’의 해적이 보물선을 지키는 해군 500명과 순례자 600명을 제압한 것이다. ‘롱벤’은 이 작전으로 단박에 ‘해적의 왕’으로 불렸다. 영국 해군 항해사 출신 헨리 에브리는 노예선을 타다가 사략선(私掠船)으로 옮겨 탔다. 1694년 ‘찰스 2세’호에서 몇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자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한 뒤, 언변이 뛰어난 에브리를 선장으로 추대했다. 꺽다리로 ‘롱벤’이라는 별명은 얻은 그는 배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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