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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퍼블릭 어페어즈
지난 10년간 글로벌 경영의 화두는 단연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였다. 기업은 가치를 말했고, 사회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가치가 곧 시장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2023년 미국 맥주 시장을 뒤흔든 ‘버드 라이트 사태’는 그 사실을 냉정하게 증명했다. 전략 없이 트렌드만 좇은 서사는 자산이 아니라 폭탄이 됐다. 2023년 버드 라이트는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을 통해 DEI라는 진보적 메시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브랜드의 핵심 고객층인 보수적 중년 남성들에게 ‘전통 가치에 대한 배신’으로 읽혔다. 새로운 고객층을 창출할 것이라는 회사의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응이었다. 당황한 회사는 ‘우리는 모두를 존중한다’는 모호한 중립 입장으로 선회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처참했다. 보수 진영에는 비겁한 변명으로, 진보 진영에는 비겁한 후퇴로 비치며 양측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결국 20년 넘게 지켜온 미국 판매 1위 자리를 내주었고 1년 후 3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2018년 나이키의 ‘콜린 캐퍼닉’ 캠페인은 정반대의 사례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글로벌 판례로 찾는 경영 전략의 Edge
영업 담당 임원은 경쟁사의 점유율 상승 추세에 고민이 깊다. “거래하는 소매업체들에게 우리 제품 5종의 매입 목표를 달성하면 결제 대금의 10%를 돌려주면 어떨까? 법무팀 검토가 필요할까?” 팀장이 답한다. “상무님,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 제품을 많이 살수록 할인해 준다는 데 문제가 될까요?”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리베이트 자체는 죄가 없다. 문제는 지급 구조이다. 많이 구매하면 더 할인해 주는 것은 거래 효율을 높이고 거래상대방에게 실질적 혜택을 준다. 단순히 많이 살수록 깎아주는 ‘물량 할인(volume discount)’은 비용 절감을 반영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경쟁사 제품 대신 자사 제품을 사는 조건으로 지급하는 ‘충성 리베이트(loyalty rebate)’는 위법한 경쟁사 배제가 문제될 수 있다. 혜택을 주는 할인인지 경쟁제한의 수단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리베이트 구조가 거래상대방에게 제공되는 인센티브인가, 아니면 경쟁사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페널티인가. 특히 목표를 조금이라도 달성하지 못하면 구매분 전량에 대한 리베이트를 잃거나, 구매 물량에 비례해 사
일본, 일본인 이야기
일본 갈 때마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다. 휠체어를 타고 전철에 오르는 노인, 보행 보조기를 짚고 상점가를 걷는 고령자, 지하철 플랫폼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자폐 청년. 일본 거리에서 틱 장애 청소년과 몸놀림이 어색한 노인을 마주치는 건 흔하다. ‘일본에 유독 자폐 장애나 신체장애가 많나’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혹시 물이나 음식, 사회적 환경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러나 통계는 선입견과 추정을 쉽게 허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유병률은 국가 간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의 경우 대체로 1~2%대로, 한국 역시 비슷한 범위로 추정한다. 미국은 다소 높지만 유의미한 건 아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아동 36명 중 1명(약 2.8%)이 ASD 진단을 받는다고 발표했다. 과학계의 주류 견해는 환경오염이나 특정 음식 때문이라기보다 유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신경 발달 특성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신체장애 통계 역시 다르지 않다. 일본 정부 통계에 따르면 등록 장애인은 약 960만 명, 인구 대비 7%다. 이 가운데 신체장애인은 3%대다. 한국 등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집어 든다. 밤사이 세계는 또 한 번 흔들려 있다. 중동에서는 확전 가능성이 거론되고, 대만 해협의 군사 훈련은 일상 뉴스가 됐다. 일본은 새로운 내각을 해산하고, 미국은 중간선거로 들썩인다. 매일매일 전세계에서 새로운 불확실성이 만들어지고, 글로벌 금융시장은 이제 실적보다 지정학적 변화를 먼저 묻는다. 기업에게 ‘오늘의 리스크’는 더 이상 환율이나 금리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 아침 뉴스의 제목이 곧 경영 환경이 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원인을 힘의 이동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찾았다. 아테네의 부상이 스파르타를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상이 스파르타로 하여금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지게 했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의 전망이론은 이 통찰을 현대적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손실 국면에 들어서면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위험한 선택을 한다. 손실을 확정 짓는 선택보다, 불확실하지만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은 선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위기 역시 다르지 않다. 사고나 논란 그 자체가 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실’로 인식
전략회의실에서 신규 사업 본부장이 보고한다. “대표님, 우리 주력 상품에 신규 서비스를 패키지로 묶어 판매하면 어떨까요? 고객 충성도가 높으니 편의도 높이고 경쟁사도 견제하는 완벽한 전략입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인기 상품에 신규 서비스를 결합하면 수익을 극대화하고 경쟁사 추격도 따돌릴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법의 잣대는 이 판단 뒤에 숨은 ‘구매 강제성’을 파고든다. 기업 입장에서 ‘끼워팔기(Tying)’는 효율적 자원 배분의 일환이다. 이미 확보한 시장 지배력을 활용해 인접 시장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건 경영학 교과서의 답안이다. “제품을 묶어 팔면 가격도 올리고 소비자 만족도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는 의사결정권자에게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경쟁당국은 이를 혁신이 아닌 경쟁자 축출을 통한 지배력 유지 수단으로 의심한다. 글로벌 경쟁법 사례는 경영 판단이 법적 리스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992년 미국 코닥(Kodak) 사건이 대표적이다. 코닥은 복사기와 마이크로필름 장비를 제조·판매하면서 부품과 수리 서비스도 제공했다. 그런데 독립 서비스 사업자들(ISO)이 코닥보다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 시장에
일본은 이웃 나라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전혀 다른 점이 많다. 국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의 출신 배경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한국은 법조인이, 일본은 관료와 세습 정치인이 과대 대표돼 있다. 평소 “판사와 검사, 변호사 출신 의원이 너무 많지 않느냐?”라고 느꼈다면 맞다. 22대 국회에서 법조인 출신은 61명으로 전체의 20%를 차지한다. 반면 일본 국회에서 법조인 비중은 6~7%에 그친다. 대신 일본 국회는 관료와 세습 정치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라마다 문화와 제도가 다르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양쪽 모두 분명한 부작용을 안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균형이 필요하다는 데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부에서는 법조인 출신이 많은 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면면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언론과 정치학자들은 “정치가 사법화되면서 한국 정치가 실종됐다”고 말한다. 정치로 풀어야 할 사안을 검찰과 사법부 판단에 넘긴다. 타협 대신 고발과 수사, 재판으로 결론을 내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사사건건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몰두하다 보니 민생 현안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법조인이 과대 대
최근 기업 위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정치 과잉’이다. 사고의 실체나 영향이 파악되기도 전에 정치적 해석과 책임 공방이 먼저 등장한다. 위기 원인인 기술적 결함이나 사고는 즉시 정치적 논쟁거리로 전환되고 위기 상황은 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재료로 소비된다. 이제 위기는 기업의 담장 안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여론이라는 거친 광장을 거쳐 곧장 국회와 정부로 직행한다. 위기의 정치화는 더 이상 예외적 상황이나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늘 고려해야 하는 구조적 변수가 됐다. 기술 문제가 정치문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는 보잉 737 맥스(MAX) 사태다. 보잉의 협동체 기종인 보잉 737 MAX는 출시된 지 3년여 만인 2018~2019년 똑같은 양상을 보인 사고가 잇달아 두 번이나 발생하면서 기종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해당 기종은 2019년 초순에 전 세계에서 운항 중단됐다가 2020년 11월에서야 운항이 재개됐다. 그러나 보잉 737 MAX 9 기종은 2024년 1월 다시 미국에서 운항이 중단됐다. 당시 사고의 직접 원인은 자동비행보정시스템이라는 기술적 결함이었다. 그렇지만 사건은 곧
금융규제 포커스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작년을 돌아보면 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의 흐름이 여럿 있었다. 우선 전자금융거래법이 개정되었다. 소위 ‘티메프 사태’가 촉발시킨 전자지급결제대행(PG)업 규제 개선 논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정법에 따라 PG업자의 정산자금 보호장치 도입, 대규모 PG업 영위에 필요한 자본금 요건 강화 등 규제가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PG의 정의조항을 정비해서 다른 주된 사업에 부수하여 내부 정산을 수행하는 e-커머스 플랫폼, 백화점, 프랜차이즈 본사 등을 전자금융업 등록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규제 불확실성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년간 지지부진했던 디지털자산 법제화 논의도 활기를 띠고 있다. 작년 6월 미국에서 지니어스법이 통과되면서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시장의 화두가 되었고, 국회에서 주도하는 법제화 논의에 업계와 규제당국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의견을 내고 있는 모양새다. 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라 조각투자상품이 제도권으로 진입한 것도 의미 있는 변화로 꼽을 수 있다. 그간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통해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던 비(非)금전신탁 수익증권 형식의 조각투자상품 발행·유통플랫
통일교가 정치권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일본 사가현 가라쓰(唐津)에 눈길이 간다. 통일교 최대 숙원인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쪽 기점으로 가라쓰가 거론되기 때문이다. 규슈에 위치한 가라쓰는 한반도와 최단 거리에 있는 일본 땅이다. 부산과 가라쓰를 연결하는 한일 해저터널은 과거 정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거론됐다. 연간 한일 방문객이 1400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해저터널이 열린다면 한일 관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부산에서 가라쓰는 200km, 해저 구간만 140km에 이른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 50km(해저 38km)와 비교하면 네 배 이상 길다. 또한 대한해협은 수심이 깊고 물살도 거세다. 100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업비에다 지진·단층·수압이라는 기술적 난관도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업 성격상 양국 정부 동의 없이는 한 발도 나갈 수 없다. 그런데도 통일교는 수십 년째 이 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 왜일까. 지금까지 드러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통일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접촉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윤석열과 이재명 후보를 놓고 배팅했다. 이들 로비가
스페이스 오디세이
과거 우주와 국방은 국가의 전유물이었다. 천문학적인 자본과 수십 년의 인내를 감당할 수 있는 정부만이 이 거대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 혁신 속도가 공공을 압도하는 ‘뉴 스페이스(New Space)’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존 방정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국방 우주 전략의 성패는 첨단 자산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느냐가 아니라, 민간의 파격적 혁신 기술을 얼마나 유연하게 ‘채택’하고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구매에서 구독으로 무기체계의 패러다임 전환 방위사업청이 2027년 법 개정을 목표로 추진 중인 ‘무기체계 임차·구독 제도’는 국방 경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대 혁신이 될 것이다. 그동안 무기는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전장 관리 시스템이나 드론, 위성 소프트웨어처럼 기술 진부화 속도가 빨라진 분야에서는 기존의 획득 방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있다. 수년간의 개발을 거쳐 전력화하는 순간 이미 ‘과거의 기술’이 되어버리는 모순 때문이다. 임차·구독 방식은 이 고리를 끊고 국방 예산을 효율화하면서도 전장에서 항상 최신 버전의 전투 효율성을 유지할
작년 12월 3월 불법적인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올 상반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적 대혼란은 과학기술·외교 현장에도 뚜렷한 악영향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계엄 사태부터 대통령 탄핵까지 약 6개월간의 국가 리더십 공백은 전방위적인 국가 전략 결정의 지연과 국제사회에서 협상력 약화로 이어졌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기술·투자 협상에서 사실상 정부 리더십의 공백으로 인해 민관 모두 허둥지둥대야 했다. 오히려 미국 측에서 우리 측의 명확한 정책 방향과 일관된 리더십 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 결과, 우리 당국은 상대국과의 세부 조건 타결에 있어 정책 우선순위의 혼선과 책임소재의 불분명함을 노출했고 기업들은 대외 투자·협력 계획 재조정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올 6월 4일 새 정부가 출범하며 정치적 리더십 부재 사태에 종지부를 찍은 뒤 우여곡절 끝에 한미 협상을 타결지었으나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여전히 만만찮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 리더십 표류에 대한 안타까운 경험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지금 세계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을 둘러싼 사실상의 기술패권 전쟁을 지속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칼을 빼들었다. 이번 타깃은 인공지능(AI) 규제다. 핵심은 ‘원 룰(One rule)’이다. 미국의 50개 주마다 따로 움직이던 AI 규제를 연방 차원의 단일 규칙으로 통일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이다. ‘기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낼 때마다 50개 주의 승인을 받는 나라에 혁신이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이 정치적 수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행정명령에 담긴 내용은 미국이 기술패권을 잃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다. 연방 규제와 충돌하는 주법을 법무부가 태스크포스까지 꾸려서 소송을 통해 제압하겠다는 구상은 ‘AI 패권 경쟁에서 규제 난립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유럽연합(EU)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EU의 인공지능법(AI Act)은 위험 기반 규제를 전면에 내세워 고위험 분야에 촘촘한 의무와 금지 규정을 부과한다. 회원국마다 샌드박스를 의무 설치하도록 하고 개인정보보호법(GDPR)과의 중첩 규제까지 겹치면서 기업의 준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부담을 감당할 체력이 있는 기업은 빅테크뿐이다. 결과는 뻔하다. 스타트업은 줄고 벤처 투자는 위축되며 유럽의 디지털 경쟁력은 뒷걸음쳤다.
해적경영학
1716년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이 활개를 칠 무렵, 대형 상선이 카리브해에 나타났다. 당시 최강의 해적 연합함대를 이끌던 벤자민 호르니골드는 해적들의 주장을 한사코 물리치며 상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영국 국기를 달았다는 이유다. 호르니골드는 윤리 기준과 애국심이 강해 스스로 해적이 아니라고 여겼다. 비록 영국 왕의 면허장을 받지 못했지만 사략선(私掠船)을 운영한다고 규정하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같은 적국의 배만 공격했다. 점점 불만이 쌓이면서, 연합함대의 해적들은 총사령관에 대한 신임을 투표에 부쳤다. ‘블랙샘’(Black Sam) 사무엘 벨라미가 추대되고, 호르니골드는 ‘검은 수염’(Black Beard) 에드워드 티치와 함께 연합함대를 떠났다. 1년 남짓 함께 해적질을 계속하던 호르니골드는 1717년 말 의견 차이로 ‘검은 수염’과 헤어졌다. 호르니골드는 영국 왕 조지 1세를, ‘검은 수염’은 전임 앤 여왕을 각각 지지했다. ‘검은 수염’은 ‘앤 여왕의 복수’(Queen Anne‘s Revenge)를 이끌고 떠났다. 18세기 초, 호르니골드는 카리브해의 해적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우두머리
아내와 함께 영화 ‘국보’를 봤다. 모처럼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건 가부키(歌舞伎)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막이 오르자, 수년 전 다녀온 시코쿠가 떠올랐다. 벚꽃 흩날리던 그해 봄날 나는 시코쿠 고토히라의 가나마루 극장에서 가부키 공연을 관람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내 인생 첫 가부키였다. 애초에는 고토히라 궁만 들릴 생각이었기에, 현지에 가서야 공연 일정을 확인했다. 15만 원짜리 1등 좌석만 남았다는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잘한 선택이었다. 1835년에 건축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전통 가부키를 경험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 공연은 낯설지만 강렬했다. 퀴퀴한 다다미 냄새와 세월이 눌어붙은 나무 기둥으로 구성된 극장은 200년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온나가타(여장 남자 배우)’의 미세한 몸짓과 떨림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그 적막과 긴장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온나가타는 여성을 연기하지만 결코 여성이 될 수 없다. 그 모순은 긴장을 만들고, 긴장은 또다시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그날 가부키 관람은 일본 전통예술과 장인정신을 깊이 체감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
1718년 7월 영국 왕 조지 1세는 신대륙 항로를 위협하는 카리브해의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렸다. 당시 바하마 나소(Nassau)에서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을 무대로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다. 이 때 해적공화국의 우두머리 벤자민 호르니골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해적이 사면을 받고 해적 생활을 청산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도 사면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해적으로 복귀했다. 처음부터 사면을 거부한 거의 유일한 해적이 바로 찰스 베인이다. 조지 1세의 명령을 받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 찰스 베인은 배 한 척에 불을 질러 나소 항구로 들어오는 총독의 함대로 밀어 보냈다. 사면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신호다. 한 술 더 떠 바로 주변에서 프랑스 함선을 약탈한 뒤 불을 질러 가라앉혔다. 한 마디로 ‘엿 먹어라’는 도발이다. 베인의 해적질은 늘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사방팔방에 불을 지르고 화약을 터뜨려 겁을 주면서, 분노와 광기로 가리지 않고 노략질하는 전형적인 해적이다. 총독과 해적사냥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베인은 상선을 하나 장악한 뒤, 해군이 다가오자 부하들을 약탈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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