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서비스는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님
역사 속 하루
연재중
기사 25개
1910년 10월 하얼빈의 러시아 조계에서 중국의 첫 페스트(흑사병) 환자가 발견됐다. 한 달 전 러시아령 다우리아에서 최초로 발생한 페스트 환자의 균이 전염된 것이다. 이는 14세기 팬데믹 수준으로 전파됐던 벼룩 매개의 선(腺)페스트와는 다른 폐(肺)페스트로, 비말로 공기 중 감염이 가능했다. 확산 속도 역시 매우 빨랐다. 이 차이점을 간파하고 폐페스트의 공기 전염을 막기 위해 의료진에게 면과 거즈로 만든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하는 등 마스크 방역을 최초로 도입한 이는 화교 출신 우롄더(伍連德)였다. 페낭 태생의 말레이시아 화교인 우롄더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중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중국 굴지의 세균학자로, 1907년부터 청 왕조의 초청으로 중국에 들어와 톈진 군의학당 부교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1910년 하얼빈에서 페스트 환자가 발생하고 확산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주 지역으로 파견됐다. 중국 북동부의 만주에서 발발한 페스트를 연구하면서 병의 근원과 전파 경로를 찾아낸 우롄더는 마침내 마스크 방역을 중심으로 1911년 3월에는 동북 지방의 페스트 확산 추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11년
]1799년 2월 22일(음력 정월 18일) 황제 가경제는 화신(和珅)의 ‘20가지 죄악’을 발표하고 화신에게 흰 비단 한 필을 하사해 자결을 명령했다. 당시 가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이 된 시기였으나 건륭제가 태상황(太上皇)으로 존재했기에 실권은 건륭제에게 있었다. 그러나 2월 7일 건륭제가 사망하자 가경제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화신을 제거했다. 하지만 화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부패의 씨앗이었다. 건륭제는 모두 6차례의 남순을 통해 물관리를 중시한다고 선언했다. 치수의 성공이야말로 백성들이 누리는 성세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륭제의 치세 후반기를 자세히 보면 성세 속에 부패의 조짐이 배태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급성장했던 만주인 화신이다. 26세에 건륭제의 호위병으로 총애를 받게 된 화신은 이후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화신은 만주어·한어·티베트어·몽골어까지 능통한 언어 능력과 특유의 사교성 및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건륭제가 바라는 바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가령 화신은 건륭제가 5번째 남순을 떠난 1780년 의죄은(議罪銀) 제도를 황제에게 건의해 시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은 평화의 시대 사이에 잠시 등장하는 막간극이 아니다. 전쟁은 본 공연의 내용마저 잊게 할 만큼 관객을 압도하는 막간극이다.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제1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을, 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제2차 세계대전은 한국전쟁을 낳았다. 이 기나긴 전쟁의 계보 끝 부분에 포에니전쟁(기원전 264~146년)이 있다. 100년 넘는 동안에 벌어진 세 차례의 싸움으로 북아프리카의 맹주 카르타고가 몰락하고 신흥 강자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페니키아인과 벌인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승자인 로마였다. 발단은 지중해 무역의 요충지 시칠리아 섬이었다. 육군 강국 로마는 막강한 해군을 보유한 카르타고에 패전을 거듭한 끝에 돌파구를 찾아냈다. 근접전을 통해 바다 위에서 육상전을 벌이는 초유의 전술로 승리하며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다. 굴욕을 겪은 카르타고는 명장 한니발의 지휘 아래 또 한 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코끼리를 앞세우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기습해온 한니발 군대의 기세에 밀린 로마군은 연패했다. 칸나이에서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원로원은 겨울철 사시나무처럼 떨
건륭제는 1784년 마지막 남순(南巡) 도중에 남쪽으로의 순례 여행이 지닌 의미를 신하들에게 선포했다. 1784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발표한 ‘어제(御製) 남순기’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약 70일 동안의 긴 여정 끝에 강남의 중심지 항저우에 도착해 그 감회와 의미를 총결산한 것이다. 1784년은 건륭제가 제위에 오른 지 49년이 되는 해였다. ‘남순기’에서 건륭제는 이렇게 자신의 치세기를 중간 정리했다. “짐이 지난 50년을 지내면서 무릇 두 가지 대사를 거행했는데, 하나가 서사이고 다른 하나가 남순이다.” 여기서 건륭제가 스스로 손꼽았던 두 가지 큰일 가운데 ‘서사’는 서북 지역으로의 군사 원정으로, 몽골의 중가르 세력을 박멸하고 그 지역에 ‘새로운 강역’인 신장을 설치한 것이다. 그는 서사에 대해서 “빨리 해야 하고 늦춰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봤던 반면 남순은 “천천히 하되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쪽 변경으로의 군사 원정을 먼저 해결하고 남순은 1751년부터 1784년까지 총 6번에 걸쳐 수행했다. 마침 6이라는 숫자는 건륭제의 롤모델이었던 할아버지 강희제가 남순을 수행했던
청나라 황제들의 남순(南巡), 즉 남쪽으로의 순례 여행은 한족을 지배한 만주족 지배층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퍼포먼스이자 제국의 역동성을 강남의 한인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동시에 한인들의 문화 중심지인 양저우와 쑤저우를 돌아보면서 북방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문화적 향유를 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다만 수도 베이징을 떠나 최남단인 항저우까지 장장 1800㎞에 달하는 대운하 코스를 왕복해야 했기에 왕복 3~4개월이 걸리는 그야말로 ‘그랜드 투어’였다. 그랬기에 많은 황제가 원했지만 모든 황제들이 남순을 갔던 것은 아니었다. 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두 주인공인 강희제와 건륭제만이 각각 여섯 번씩 행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남순은 청의 역동성과 관련된 성세의 상징이라 할 만했다. 건륭제는 1784년 2월 11일(음력 1월 21일) 베이징을 출발하며 남순을 선포했다. 25세에 황제에 오른 건륭제의 치세 49년이 되는 해였고 집권 이후 여섯 번째 떠나는 남순이었다. 명분은 강남 지방을 두루 살피면서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강남의 문화적인 힘은 건륭제에
사라져서 좋은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소아마비다.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학교 풍경에는 이 질환을 겪은 친구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없다. 1983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온 세상에서 그렇게 될 것 같다. 고통의 끝이 보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아이반호’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은 평생 절면서 자신의 증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역시 네 살부터 갖게 된 장애에 굴하지 않고 소아마비 퇴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폴리오로 불리는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주로 아동의 신경계를 공격하여 신체 마비 증상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도 소아마비를 앓던 조너스 소크가 백신 개발을 발표하기 직전인 1952년 미국에서는 5만 8000명이 감염됐다. 사망자만 3000명이 넘었다. 미국인들이 핵폭탄보다 소아마비를 더 두려워했다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소크의 쾌거 배후에는 국립소아마비극복재단(NFIP)이 있었다. 이 재단을 출범시킨 사람이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164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얀스존 타스만이 오스트레일리아 동남부의 제법 큰 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1856년 그의 이름을 따라 태즈메이니아가 됐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마르코 폴로가 말한 ‘황금의 섬’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두 척의 배와 110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금을 찾지 못한 채 섬을 떠났다. 이 섬이 유럽인의 관심을 다시 끈 것은 1777년 제임스 쿡 선장의 발견 후였다. 1803년 형무소 설립과 함께 영국인의 정착이 시작됐다. 영국은 이 섬을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으로 간주하고 7만 명이 넘는 죄수를 보냈다. 백인 정착민이 늘어나면서 원주민과 갈등이 쌓여갔다. 1825년부터 1831년 사이에 절정에 달한 ‘검은 전쟁’으로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는 일방적이었다. 원주민 희생자 비율이 4배였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백인과 원주민 충돌로 발생한 희생자 비율이 1대10에 달했기 때문에 공포감에 사로잡힌 백인들은 원주민에 대한 절멸을 요구했다. 그 결과 1828년에 3년 시한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1830년에는
이달 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행사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전달한 선물 가운데 문방사우가 있었다. 문방사우를 소개할 때 시 주석은 직접 그 가운데 붓에 대해서 추가적인 설명을 직접 하면서 “저장성 후저우(湖州)의 붓인 호필(湖筆)”이라고 강조했다. 호필은 오랫동안 중국 지식인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붓이다. 오늘날 끝이 날카롭고 탄력이 뛰어난 호필의 대표적인 생산 기업은 2006년 중국의 대표적인 ‘라오쯔하오(老字號·오랜 전통을 가진 상호)’ 430개 브랜드로 선정된 왕일품재 붓 공방 회사다. 이 회사는 그 기원을 청나라 건륭제의 치세 6년에 해당하는 1741년으로 잡고 있다. 1739년 청의 수도 베이징에서 과거의 마지막 단계인 회시(會試)가 거행됐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지식인들이 경쟁하는 마지막 시험 결과 장원급제로 선정된 이는 수도에서 가장 먼 광둥 출신의 장유공으로 밝혀졌다. 1739년 음력 4월 4일 청 고종실록에는 답안지를 열람한 건륭제가 “1등으로 선정된 답안이 매우 적당하다”면서 외진 광둥에서 장원급제가 나온 것을 칭찬했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에는 과거
서양 역사에 총통으로 불린 유명한 사람이 둘 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다. 1922년 10월 31일에 무솔리니가 총리직에 전격 임명됐을 때만 해도 그로 인해 세계사의 판도가 바뀔 것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무솔리니의 시작은 극히 미미했다. 전직 언론인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린 무솔리니는 1919년 3월에 고향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투쟁 결사’를 조직했다. 빈부와 계급의 차이를 넘어 과거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는 진정한 민족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그에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모든 혼란의 원인이었고 의회는 불화와 정쟁의 온상일 뿐이었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무솔리니는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동물적인 권력 감각을 가진 그는 예비역 군인들을 모집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지만 전리품 분배에서는 소외된 이탈리아에서 가장 울분에 찬 집단이 바로 퇴역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태로 구성된 ‘검은셔츠단’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국민에게 질서 회복을 약속했다. 공산혁명을 두려워하던 정부는 조직화된 폭력을 방조했고 질서
올해는 중국 베이징에 고궁박물원이 설립된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지난달 말부터 ‘백년의 수호(百年守護): 자금성에서 고궁박물원까지’라는 주제의 전시를 시작했다. 고궁박물원이 시작된 날은 1925년 10월 10일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자궁성에서 나온 뒤 청실선후위원회(清室善后委员会, 고궁박물원의 전신)가 각 전각에 소장된 문물에 번호를 매겨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10월 10일은 1911년 우창에서 신해혁명이 발생해 중화민국 성립의 계기를 만들고 지금까지도 국경절(쌍십절)로 지켜오는 날이었다. 이로써 명·청 시대 자금성의 궁중 소장품이 박물원 소장품이 됐고, 황실의 사유재산은 국가의 공공재산으로 바뀌었다. 이번에 베이징 고궁박물원 전시회에 출품된 200점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전시물은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세밀하게 그린 5.28m에 달하는 두루마리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였다. 제목처럼 이 그림은 청명절을 맞아 수도 카이펑의 풍경을 운하와 도시 안의 번화한 시장, 800여 명 인물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청명상하도’를 국보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1882년 9월 25일 일본 땅에서 태극기가 처음으로 게양됐다. 고종이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임명한 21세의 청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향하는 메이지마루(明治丸) 호 선상에서 그린 바로 그 깃발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깃발이 최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에 역관 이응준이 최초의 태극기 제작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영효의 일본 방문 몇 달 전에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미국의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가 조선 대표에게 조인식에서 사용할 국기 제정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김홍집이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다는 것이다. 태극과 4괘 문양을 갖춘 그의 태극기는 122년이 지나서야 미국 해군부 항해국이 발간한 ‘해상 국가들의 깃발’ 속에서 발견됐다. 이로써 박영효의 태극기는 ‘최초’의 지위를 잃게 됐다. 하지만 그가 만든 태극기가 해외에서 최초로 게양된 우리 국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응준의 것과 비교할 때 박영효의 태극기는 괘의 좌우가 바뀌었다. 바로 이 수정본이 1883년 3월 6일에 조선의 국기로 공식 선포됐다. 1949년 10월 15일 대한민국의 국기로 공식 제정되기 전까지 상징으로서 태극기에는 수많은 기억과 이
소위 ‘대항해시대’를 개척했던 포르투갈과 중국의 첫 만남은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가득했다. 포르투갈인들의 중국 방문에 대한 명나라 실록의 첫 기록은 1517년 6월 15일 등장하는데 당시 사절단을 이끌던 선장 페르낭 피레스 데 안드라데는 광저우에 진입하는 주장강에 닻을 내리자마자 휘하의 포병들에게 예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이는 외국 항구에 도착한 유럽 함대가 일반적으로 행하던 환영과 존경의 표시였을 것이다. 꽝! 그러나 명의 관리와 군인들은 예포 소리를 듣고 경악했다. 중국에서 환영과 존경의 의미로 대포를 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적대 행위 혹은 최소한 위협의 신호였다. 다행히 안드라데가 사과함으로써 상황이 잘 수습됐으나 이 첫 만남의 해프닝은 이후 진행될 양국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명나라가 바다 건너에서 오는 선박을 받아들이는 분류는 조공 아니면 밀수 단 두 가지였다. 가령 당시 류큐와 일본에서 오는 선박은 조공선으로 인정되기에 입국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공국 명단에 없던 포르투갈의 선박은 어떤 명분으로 입국시킬 수 있는가. 포르투갈이 중국에 접근한 목적은 명백히
매년 여름이면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음악 축제가 열린다. 오페라의 향연이 펼쳐지는 페스트슈필하우스 바로 앞에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청동 두상이 있다. 이곳 무대에는 바그너의 유언에 따라 그가 초기작 ‘사랑의 금지’나 ‘리엔치’ 같은 이탈리아·프랑스풍의 오페라는 오르지 못한다. 음악극 장르를 개척한 바그너의 후기 작품 10여 곡이 상연된다.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과 함께 이 축제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작품이 ‘로엔그린’이다. 결혼식에 자주 등장하는 ‘혼례의 합창(결혼행진곡)’ 덕분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 작품이 1850년 8월 28일 바이마르에서 초연됐다. 하지만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리스트가 지휘를 맡아 성공을 거둔 이 자리에 바그너는 함께할 수 없었다. 혁명 가담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규모 없는 소비, 성공에 대한 야심, 새로운 음악 형식에 대한 집념, 유부녀와의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 개혁의 꿈이 그의 삶을 가장 굴곡지게 만들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한 직후 정치 후진 지역인 독일에도 변혁의 불꽃이
지금도 중국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따라 여행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남쪽의 경제 중심지 항저우에서 출발해 중국의 대표적인 하천인 창장강과 황허강을 가로질러 북쪽의 정치 중심지 베이징까지 도달하는 약 1800㎞의 인공 수로 여행이다. 과거 명·청 시대에 배를 타고 이동할 경우 2∼3개월 혹은 그 이상이 걸렸다. 조선 시대에 연행사로 명과 청의 수도인 베이징으로 간 조선인들은 많지만 대운하를 이용해 강남 지역까지 모두 둘러본 기회를 잡은 이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유일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한 조선인은 관원 최부(1454~1504)였다. 그가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를 경유하며 남긴 ‘표해록(漂海錄)’은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기행기로 꼽힌다. 그런데 최부는 본래 중국의 대운하 여행을 원해서 갔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하지 않던 표류를 당했기에 대운하 기행이 가능했다. 발단은 1488년 음력 윤정월 3일(양력 2월 24일)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출항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제주에서 추쇄경차관으로 근무하던 최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풍랑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 아돌프 히틀러는 제3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몇 개의 야심 찬 계획을 수립했다. 그 프로젝트의 완결판이 하계 올림픽이었다.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제11회 올림픽은 히틀러의 계획대로라면 금빛 머리 휘날리는 아리안 민족의 축제로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기대는 이내 흔들리기 시작했다. 8월 3일에 육상 100m 경주에서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가 독일의 에리히 보르흐마이어를 제치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다음 날 멀리뛰기에서도 오언스는 유럽 신기록 보유자인 독일 선수를 누르고 1등을 차지했다. 예선에서 거듭된 실격을 딛고 일궈낸 결과였기 때문에 관중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오언스는 200m 달리기에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4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언스는 트랙 바깥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올림픽의 전설이 됐다.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가 축하를 거부했다는 ‘악수 거부’ 사건이다. 이 소식은 루머에 불과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이유가 없지도 않았다. 100m 결승전에서 오언스가 우승한 직후 히틀러가 아예 모든 선수들에게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