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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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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 아돌프 히틀러는 제3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몇 개의 야심 찬 계획을 수립했다. 그 프로젝트의 완결판이 하계 올림픽이었다.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제11회 올림픽은 히틀러의 계획대로라면 금빛 머리 휘날리는 아리안 민족의 축제로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기대는 이내 흔들리기 시작했다. 8월 3일에 육상 100m 경주에서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가 독일의 에리히 보르흐마이어를 제치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다음 날 멀리뛰기에서도 오언스는 유럽 신기록 보유자인 독일 선수를 누르고 1등을 차지했다. 예선에서 거듭된 실격을 딛고 일궈낸 결과였기 때문에 관중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오언스는 200m 달리기에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4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언스는 트랙 바깥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올림픽의 전설이 됐다.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가 축하를 거부했다는 ‘악수 거부’ 사건이다. 이 소식은 루머에 불과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이유가 없지도 않았다. 100m 결승전에서 오언스가 우승한 직후 히틀러가 아예 모든 선수들에게 공
청나라의 몰락은 단순히 거대한 한 나라의 쇠락이 아니었다.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화제국의 쇠락이자 고대 문명부터 지속된 중대한 문명의 몰락을 의미했다. 중국을 오랫동안 문명의 중심으로 믿었던 조선인에게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은 청을 망하게 한 인물로 서태후(자희태후)를 꼽는다. 서태후는 거의 반세기 동안 청을 사실상 통치했던 청 황실의 마지막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의 측천무후처럼 여성 황제로 등극하지 않았지만 청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자 이후 추존황후였으며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고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였다. 제12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부의)의 큰친할머니였던 서태후는 사실상 함풍제 이후의 황위 계승과 정치의 최고 결정권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 유명한 양무운동·변법자강운동·의화단운동, 그리고 마지막 신정(新政)은 모두 서태후 없이는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영향력은 음양으로 막대했다. 그런 서태후가 1908년 11월 15일 사망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11년 청은 신해혁명을 통해 완전히 무너졌다. 놀라운 것은 서태후가 죽기
1944년 7월 암스테르담 시내에 숨어 지내던 안네 프랑크 일가에게 연합군의 프랑스 해안 상륙 소식이 전해졌다. 2년 넘게 지속된 은둔 생활에 지친 안네 가족에게 이보다 더 기쁜 뉴스는 없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삶의 의미를 찾아서’의 저자 빅토르 프랑클은 공포스러운 테레지엔슈타트 게토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나치즘의 억압에 숨죽이던 유럽 사람들에게 6월 6일 단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감격스러운 해방 서사의 시작이었다. 훗날 인천 상륙작전의 모델이 된 이 작전은 4년 전 됭케르크에서 퇴각해야 했던 연합군의 통렬한 복수극이었다. 종전 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최고사령관에 임명됐고,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지상군을 지휘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별칭답게 연합군 측에서만 39개 사단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됐다. 현란한 기만작전 때문에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불순한 일기까지 더해져 방어의 총책임을 진 독일군의 명장 에르빈 로멜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규모 작전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상륙 거점을 확보하기까지 연합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안녕,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1930년대 초와 1934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이런 피로감은 어떤 때에는 너무나 심해져 형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을 정도까지 되었소. 당시 나는 느꼈소. 우주가 사멸하든 말든 혁명하든 반혁명을 하든 간에 좀 쉬었으면, 쉬었으면, 쉬었으면!! 그렇소, 이제 ‘영원한 휴식’의 기회가 왔소.” 1935년 5월 22일 공산주의자 구추백(瞿秋白·취주바이)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다여적화(多餘的話·부질없는 이야기)’의 한 구절이다. 중국공산당의 영수로 추앙받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 초반을 살아갔던 구추백. 하지만 그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돼 사형되기 한 달 전에 남긴 최후 진술서 ‘다여적화’는 충격적인 자기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평범한 일개 문인이 중국 공산당의 영수로 명성을 누린 것이야말로 “‘역
한국인이 좋아하는 영화 중에 ‘로마의 휴일(1953)’과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이 있다. 두 영화의 여주인공이 오드리 헵번이다. 배우로, 패션스타로, 봉사활동가로 활약했던 그녀는 1929년 5월 4일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세계적인 배우로 성공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의 별거 이후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자 파시즘에 가담한 부친 때문에 다시 외가가 있는 네덜란드로 갔다. 잠시 누리던 평온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으로 파괴됐다. 지역의 명사인 외할아버지가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면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저택에서 추방됐다. 헵번은 어린 나이였지만 외가의 영향 속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후 기근이 발생하자 가족 모두가 쓰레기통을 뒤지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쳤
베를린 봉쇄가 한창이던 1949년 4월 4일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출범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서둘러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까지 동참했다. 나토는 단순한 군사안보 동맹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가치 동맹이었다. 출범 당시 12개국이었던 회원국 수는 32개로 늘어났다. 나토의 팽창 원인은 점차 증가하는 안보 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서독과 스페인,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새 회원국이 됐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에는 발트해 3국과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가입했다. 2024년에는 스웨덴이 나토의 일원이 됐다. 나토의 ‘동진’이라는 표현처럼 나토는 부단히 팽창해왔다. 현재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역시 나토
카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마르틴 니묄러. 이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한 굴종을 거부하고 성서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설립된 고백교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1934년 ‘바르멘 선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나치 수뇌부는 격분했고 결과는 가혹했다. 스위스 태생의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됐다. 신앙적 차원의 반대를 넘어 히틀러 제거 운동에 적극 참여한 본회퍼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됐다. 미치광이 운전사가 버스를 운전할 때 목사의 할 일은 기도에 머물지 말고 운전석에서 끌어내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본회퍼와 달리 니묄러는 교회와 신앙의 틀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도 침묵과 기도만은 아니었다. 1936년 고백교회의 핵심 지도자로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엄청난 희생을 불러올 악법이 1935년 9월 15일 독일에서 통과됐다. 바이에른 지방의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인준된 이 희대의 인종차별법은 두 가지 내용을 담았다. 제3제국 시민법으로 불리는 부분은 독일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법에 해당하는 부분은 독일 시민과 유대인 사이의 혼인이나 성관계를 금지했다. 근대 세계가 쌓아 올린 보편적 가치와 상식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법을 통해 대학살로 가는 길이 열렸다. 곧이어 마련된 시행령은 누가 유대인에 해당하는지를 규정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친가와 외가 조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 이상이 유대인이면 누구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대인은 선거권도 잃었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이 조치는 시작에
영국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가 맨체스터다. 축구 팬들에게는 박지성 선수가 활약한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최근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한 맨체스터시티의 연고지로 잘 알려져 있다. 1819년 8월 16일 이 도시 중심에 있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모여든 수만 명의 군중을 기마부대가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 참사를 역사가들은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로 기록한다. 1815년 6월 18일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워털루 전투의 이름을 사건 직후 지역 언론이 패러디해 만든 용어다. 정부와 군대가 자국민에게 행사한 일방적 폭력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에서는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
2차 대전 이후 독일은 전범 국가가 됐다. 비난은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된 주요 전범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평범한 독일인들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로 간주됐다. 그 때문에 모든 독일 국민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밝히는 소명서를 연합국 군정 당국에 제출해야 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독일인은 나치 체제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루머가 생겨났다. 사실은 이와 달랐다. 독일인 중에는 나치에 저항하거나 국법을 어기고 유대인 구출에 가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남녀노소가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는 기록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저항에 참여한 독일인 중에는 군 장교들도 있었다. 이들은 체제 내부에서 총통을 암살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 일을 독일인들은 ‘7월 20일 사건’으로 가르친다. 이 사건의 중심에 클
1905년 중국 지식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중국을 구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당시 지식인들이 몸담고 있던 청나라는 외부 세력의 공격과 내부적인 반란이 겹치면서 왕조의 생명력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찬란했던 18세기 강희·옹정·건륭의 성세(盛世)가 거짓말 같았다. 기억 속의 전통과 중요한 것들을 오랫동안 이어가려면 얼마나 강력한 변화가 필요할 것인가. 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와 장지동(張之洞) 등 여섯 명의 독무(督撫)들은 과거제 폐지를 요구했다. 청 조정은 1905년 9월 2일 과거제를 폐지한다는 황제의 유지(諭旨)를 반포했다. 이로써 직전 해인 1904년 5월의 과거를 마지막으로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과거제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대부분 과거 출신자로 구성됐던 관료들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숨이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