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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이후 프랑스 미술 시장은 국가 중심의 살롱 체제에서 상업 화랑 체계로 재편됐다. 부르주아 중산층이 미술품의 새로운 소비자로 부상하면서 미술은 감상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는 문화 자본으로 간주됐다. 새로운 상업 시장 조건에 부합하는 화가로 단연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보라. 르누아르의 짧고 부드러운 붓질이 춤추는 남녀 사이로 와인에 취해 홍조를 띤 여인의 뺨 위를 스치듯 지나면서 밝은 햇살을 균등하게 분배한다. 르누아르의 회화는 누구나 이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초대장이다. 부르주아 소비자는 그림의 분위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벨 에포크의 낙천주의를 자신의 거실에 걸고 싶은 충동으로 지갑을 연다. 일상의 모든 통증이 순간 유예된다. 하지만 물랭 드 라 갈레트의 행복을 배달하던 르누아르의 빛이 이내 논쟁의 도마에 올랐다. 시장은 르누아르의 감성에 갈채를 보냈지만 알베르 볼프 같은 비평가는 새로운 소비자의 취향에 대한 아첨을 봤다. 현대의 비평가 그리셀다 폴록은 르누아르의 보슬보슬한 붓질에서 부르주아적, 남성적 시선의 낯익은 쾌락의 판타지를 읽어낸
1550년경 이탈리아 베니스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세 남자의 얼굴이 세 개의 동물 머리 위에 겹쳐진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제작했다. 화면 왼쪽에는 노인과 늑대, 중앙에는 중년 남자와 사자, 오른쪽에는 젊은 남자와 개의 형상이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다. 다수의 두상이 하나의 몸체에 결합돼 있는 듯한 이 기묘한 그림의 의미와 목적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이 작품 속에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담겨 있고 세 남자의 얼굴은 인간의 생애 주기를 상징화한 것으로 해석한다. 서양 문화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 관례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이 그림에는 인생의 세 순간, 즉 노년·성숙·청춘의 시기가 역순으로 표현돼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노인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존재이며 정면을 응시하는 성숙한 남성의 얼굴은 행동하는 현재를 의미하고 젊은 청년은 기대에 찬 미래를 대변한다. 각각의 머리 위에 검은색으로 새겨진 라틴어 비문은 이 그림이 시간과 신중함에 대한 우화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3개의 얼굴에 대응하는 라틴어 문구들은 좌측부터 과거에 대한 기억,
폴 고갱은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조직하고, 그것을 하나의 브랜드로 설계한 근현대 미술의 초기 사례다. 그는 타히티로 떠난 이유를 ‘인류의 유년기로의 회귀’라 설명했지만 그 원시성은 서구 미술 시장의 욕망을 향해 정교하게 조율된 시선이자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인상주의가 포화 상태에 이른 파리 미술 시장에서 정규 교육도 아카데미적 경력도 부족했던 그는 회화 실력 대신 ‘문명을 떠난 야인 화가’라는 서사를 구축했다. 고갱은 순수성을 찾아 식민지로 향한 야인, 근대에 저항하는 예언자의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회화·편지·회고록, 심지어 사적인 관계마저도 이 서사를 강화하는 재료가 됐다. 타히티의 풍경과 원주민 여성의 몸, 신화적 상징은 그렇게 유럽 부르주아의 욕망을 겨냥한 시각적 언어로 재편됐다.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이 전략이 한껏 응축됐다. 화면 안에서 시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흐른다. 아기를 내려다보는 여성에서 성숙한 육체로, 다시 고개 숙인 노인의 형상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하던 1804년. 앙투안 장 그로는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가로 7m가 넘는 거대한 화폭 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제작됐다. 전장의 화염이 솟구치는 원경과 이슬람 사원을 연상하게 하는 건축물, 그리고 중동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화면 구성은 매우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전달한다. 무엇보다도 화면 중앙에 위치한 나폴레옹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예수의 기적을 재현하려는 듯 그는 맨손으로 병자의 환부를 만지고 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화이지만 표현 방식은 종교화의 성격을 띤 독특한 그림이다. 이 작품 속 장면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수행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1799년 3월 7일 나폴레옹은 오스만제국의 주요한 거점 항구였던 자파를 점령했다. 전투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으나 병사 중 1500명 이상이 흑사병에 감염됐다. 원정군의 수석 군의관 데스제네트 남작은 이들을 사원에 격리하고 흑사병에 의한 감염 사실을 은폐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두 차례에 걸쳐 격리소를 방문했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화가가 구현한
1889년에서 1891년 사이, 모네는 지베르니 지역의 ‘건초 더미’를 반복해서 그렸다. 1년이 지난 후에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소재를 그릴 정도로 집요했다. 여러 점을 그려도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연작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처음에는 냉소적이었다. 평론가들은 같은 풍경을 반복해서 그리는 모네의 의도를 미심쩍어했다. 모네가 내세우는 빠르고 임의적인 붓질은 조급한 완성을 위한 핑계일 뿐 실제로는 서두른 티가 역력한 함량 미달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화상 폴 뒤랑뤼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모네가 그린 연작의 잠재적인 시장성을 일찍이 간파했다. 살롱 스타일을 대체할 상품에 목마른 시장에서 연작은 부르주아 수집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신선한 대안이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더 나아가 연작은 한 그림의 경제가치를 분할·확대해 시장을 키우는 묘수가 될 수도 있었다. 빛의 효과를 더 많은 캔버스에 나눠 그릴수록 시장가치도 그에 비례해 배가되는 ‘기적의 연금술’을 모네의 연작에서 봤던 것이다. 이 연금술은 1891년의 개인전을 통해 즉각 구현됐다. ‘건초 더미’ 연작 20점이 제각각 흩어져서는 안 될, ‘하나의 꾸러미’로 인식되도
1500년 초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자화상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그림 중 하나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뒤러는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 그가 유화로 그린 자화상은 3점이 남아 있는데 그중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 가장 유명하다. 정면을 바라보는 화가의 모습이 화면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검은 배경 면에는 황금색으로 쓰인 글씨가 새겨져 있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다. 화가의 얼굴 바로 옆 한편에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에 영원한 색채로 나 자신을 그렸다”는 문장을 배치하고 다른 편에는 그림이 제작된 해 ‘1500년’과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AD’를 표기했다. 이 그림 속에서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화가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하다. 당시 관점에서는 청년에서 성숙한 인생 단계로 넘어가는 나이에 해당하지만 그럼에도 젊은 화가의 모습치고는 너무나 장엄하고 강렬하다. 완전한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는 화가의 얼굴이 중세 기독교 성상화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불경스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관람자와 시선
중세 말기의 화가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의 프레스코는 단순히 지옥의 풍경이 아니다. 그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목적도 아니다. 중세 도미니코회의 신학에서 지옥은 혼돈이 아니라 각 죄인이 자신의 죄에 부합하는 자리에 배치되는 완벽한 질서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보나이우토의 그림이 그 명확한 위계적 구조를 보여준다. 색은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깊은 어둠을 표현한다. 빛에서 빛의 단절로의 단계, 그 마지막은 신적 광휘가 완전히 소멸된 심연, 곧 영적 공허의 공간이다. 맨 왼쪽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첫 번째 신자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담이다. 그 옆에 이브가 있고, 이브 뒤로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이는 세례 요한이다. 요한 뒤로 나무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노아일 것이다. 맨 오른쪽은 죄인들의 자리, 곧 지옥이다. 지옥은 또다시 여러 단계로 나뉜다. 먼저 이웃의 것을 탐하는 죄인 탐욕을 벌하는 특정 구역이 있다. 교만은 탐욕보다 무거운 죄로 더 아래층에 위치한다. 최악의 죄인 배신은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다. 타락한 천사는 지옥에서 질서의 집행자다. 지옥이 신이 인간을 처벌하기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는 1828년 로마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역사풍경화 한 점을 제작했다. 레굴루스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포로가 된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기록에 따르면 양국의 포로 교환을 협상하기 위해 카르타고 정부는 그를 로마에 특사로 파견했으나 레굴루스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적과의 협상을 중단할 것을 원로원에 권했다. 이후 협상에 실패한 채 카르타고의 포로 신세로 되돌아간 그는 눈꺼풀이 잘려 두 눈이 실명되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를 위해 행동한 레굴루스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로마인들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할 때 공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레굴루스가 보여줌으로써 로마의 도덕적 규범이 바로잡혔다”고 칭송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시련을 겪어보지 않는 자는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그의 관점에서 공적 윤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레굴루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한 위대한 본보기였다. 낭만주의 화가 터너에게도 이러한 레굴루스의 전설적 운명은 매
4세기 초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 동정 순교자 아그네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 1905년 마지막 라파엘전파로 알려진 영국 화가 프랭크 카도건 카우퍼에 의해 그려졌다. 그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세 되던 해 성녀 아그네스는 로마 고위 관리 아들이 요청한 순결 서약 포기를 거절한 대가로 고발돼 알몸 상태로 사창가로 보내졌다. 그녀의 순결을 짓밟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신앙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전승에 의하면 아그네스가 내던져진 사창가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머리털에 신성(神性)이 임하자 온몸을 덮어 보호할 만큼 왕성하게 자라났다. 그녀의 기도는 천상의 빛이 돼 그녀를 범하려는 남자들의 시력을 앗아갔다. 그 광휘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의 방 근처에만 다가서도 두려움으로 사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녀에게 청혼했던 관리의 아들은 그녀를 범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카우퍼는 화폭의 오른쪽 상단부에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를 배치한다. 카우퍼의 재능이 십분 발휘되는 두 화점(火點)에 주목하자. 첫째는 천천히 하강하는 천사의 ‘불쌍히 여기는 시선’과 아그네스의 ‘위로 향한 경외의 시선’이 대각선으로 교차되도록
프랑스 파리 북쪽에 위치한 몽마르트르는 해발 130m의 작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그 지명에는 특별한 뜻이 담겨 있다. 첫음절 몽은 불어로 산을 뜻하는 몽타뉴의 줄임말이고, 마르트르의 의미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우선 로마제국 시대에 파리를 점령한 로마인들이 전쟁의 신 마르스를 기념하는 신전을 이곳 언덕 위에 세웠기에 이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어원은 순교의 산이라는 뜻인데 최초의 파리 주교로 알려진 생드니 성인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 병사들이 경사면 중간에서 그의 목을 자르자 생드니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들고 산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이곳은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성지로 인식돼 그를 기리는 종교 시설들이 자리 잡게 됐다. 19세기에 들어서서 몽마르트르의 위상은 변화했다. 대혁명기 수도원이 폐쇄되고 점차 이곳에 산업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높은 지형을 활용해 설치된 풍차들이었다. 풍차를 활용한 제분소 주변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거주지가 형성됐다. 1870년 발생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파리 코뮌이라 불리는 새로운 혁
남편은 저울로 금화와 보석의 무게를 다는 일에 여념이 없다. 복장으로 보아 앤트워프의 부유한 중산층이다. 그의 아내가 옆에 앉아 있다. 그녀 앞에 성모와 아기 예수가 그려진 기도서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잠시 전까지 기도와 명상 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방금 전 남편이 세는 금화에 고정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보화와 재물이 그녀의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다. 이 일의 이름은 ‘미혹의 작은 시작’이다. 하지만 이내 눈덩이처럼 불어나 영혼까지 집어삼킬지도 모를 작지 만은 않은 시작이다. 금화를 세는 남편보다 금화를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이제껏 그녀의 영혼을 인도했던 기도와 명상이 재물과 탐욕으로 대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작은 미혹이 장차 지불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1885년 작 ‘맘몬’이 잘 요약한다. 황금은 타락한 신 맘몬이 즐겨 입는 외투다. 그가 쓰고 있는 당나귀 귀가 달린 왕관은 부를 숭배하는 것의 결과론적인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이 신은 우둔해 보이지만 그 외양조차 쉽게 경계를 풀도록 만드는 탁월한 전략의 일환이다. 그의 무릎
야생 딸기가 가득 차 있는 바구니 옆에는 복숭아 한 개와 체리 두 개 그리고 흰 카네이션과 물 한 잔이 놓여 있다. 18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풍속화의 거장이자 섬세한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시메옹 샤르댕의 작품이다. ‘딸기 바구니’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1761년 파리 루브르궁에서 열린 살롱전에서 처음 대중에 공개됐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18세기 프랑스 미술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이미지가 됐다. 2022년에 열린 파리 아트큐리얼 경매에서 낙찰된 이 그림의 가격은 2240만 유로(약 390억 원)다. 샤르댕의 작품 중 유일하게 딸기가 등장하는 이 그림은 시적 우아함을 지닌 정물화로 평가받는다. 세로 38㎝, 가로 46㎝의 이 작은 정물화가 지닌 매력은 정지된 시간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화면 구성과 세부 묘사를 제거한 극도의 단순함은 일상의 고요한 순간을 재현하는 듯하다. 샤르댕은 1년에 평균 네 점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계절적 리듬을 기반으로 작업이 이뤄진 것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1761년 초여름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이유에서 이 그림 속 모든 요
캥탱 마시의 1520년 작 ‘고리대금업자들’은 돈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인물 군상이다. 하지만 기괴하게 일그러진 것은 그들의 얼굴 외형이 아니라 영혼의 표정이다. 간교한 시선, 음흉하게 다문 입, 선(善)은 가능하지 않다는 오만한 판단에서 비열함이 끝없이 샘솟는다. 은총에서 배제된 영혼의 특징이다. 가련하게도 그들은 오로지 채무자만 있는 세계에 갇힌 채 무덤 앞에서 휘파람을 부는 사람처럼 동전만을 세고 있다. 캥탱이 ‘고리대금업자들’을 그렸던 16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죄로 규정할 정도로 고리대금이 만연했고, 미술은 이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도덕의 시대는 지나갔다. 1972년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대형 아크릴 회화 ‘화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이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의 ‘전후 및 현대 회화 이브닝 세일’에서 9031만 2500달러(수수료 포함)의 가격으로 낙찰됐다. 경매 막바지 9분의 치열한 경쟁이 가격을 가파르게 끌어올렸다. 생존 작가의 최고가였다. 이전의 기록은 2013년 제프 쿤스의 ‘풍선 개(오렌지)’가 세웠던 것으로 5억
“지옥의 문은 모든 희망을 버린 자들에게 열려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저술한 중세 문학의 걸작 ‘신곡’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지옥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은 절망의 상태를 상징함을 상기시키는 문구다.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죽음 후 인간 영혼의 여정과 구원 과정에 관해 탐구하는 단테의 서사시는 서구 많은 작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다.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우의적 여행담의 형식을 지닌 이 작품에 크게 매료됐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단테의 조각배’는 1822년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의해 제작됐다. 당시 22세의 무명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첫 번째 살롱전 출품작이자 그의 명성이 시작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작품 제작에 필요한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화가가 루브르에 전시된 대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하며 단 세 달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표류하는 영혼들의 처절한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주제의 독특함과 아카데미 규범에서 벗어난 들라크루아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해 화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의 1859년 작 ‘키스’는 여러 면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와 비교된다. 하예즈의 ‘키스’는 클림트의 것에 비해 반세기 앞서 그려졌고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두 그림의 차이는 고전적 사실주의와 아르누보 스타일의 형식적인 것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클림트의 입맞춤은 존재의 심연에서 충동질하는 에로티시즘을 웅변한다. 사적이고 감각적이다. 상대는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으로 특정된다. 그림에서 플뢰게는 감정에 도취돼 있다. 반면 하예즈의 것은 사적이지 않다. 이 입맞춤을 견인하는 힘은 역사성이요, 상징성이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분열된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다. 남녀상열지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서사적 공명, 이 시대가 잃어버린 비장미가 이 미학의 진앙이다. ‘에로티시즘적 사랑 외에 모든 건 하찮을 뿐’이라는 현대적 슬로건이 습관적으로 폄훼하는 바로 그 미학이다. 하예즈의 입맞춤도 하나됨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별이 예고된 뼈아픈 갈망이다. 남자는 더는 여인 곁에 머물 수 없고 여인도 들이닥칠 이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