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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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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햄넷(Hamnnet)’을 극장에서 관람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야기마저 없다면, 소설이나 영화나 희곡마저 없다면, 인간은 과연 어떻게 그 모든 슬픔과 분노의 나날들을 견뎌냈을까.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우리들의 고통을 ‘끝내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해주는 시와 소설이 있어, 영화와 연극과 오페라와 뮤지컬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콧날이 시큰해졌다. 맥기 오파렐의 소설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이기도 한 클로에 자오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슬픔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셰익스피어가 흑사병으로 죽은 어린 아들 햄넷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 햄릿을 창작했다는 가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그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아내 아그네스가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하며 끝내 매일매일 닥쳐오는 슬픔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는 점이 아닐까. 영화는 차분하고도 집요하게, 깊은 슬픔이 끝내 예술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가족을 떠나 머나먼 런던에서 희곡을 써야
사람들은 제가 ‘동네책방에서 북토크나 강의를 한다’고 하면 ‘강연료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강연료 이상의 넘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답합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이 많지요. 강연이라는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금전적인 보상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작가로서, 강연자로서, 강연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주로 책방 주인의 1인 노동으로 운영되는 작은 공간에서는 그런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대신 책방에는 ‘열광적인 독자들’이 방문합니다. 30명이 강연을 들으면 30명 모두 책을 구입해 제 친필 사인을 받기도 합니다. 눈을 반짝이며 작가의 강의를 들어주고, 깊은 통찰이 담긴 질문을 던지는 독자들의 얼굴을 보면 열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작가로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들어주는 독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동네책방 북토크의 커다란 보람입니다. 동네책방만이 지니는 따스한 공간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책방 주인이 직접 정성 가득한 손글씨 편지로 책을 추천하는 모습을 보면 그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지요.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내가 왜 이 책을 사랑하
삶의 마지막 문턱에 서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마주하는 내 삶의 소중함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순간들이 실은 얼마나 공허한 가면극이었는지를 폭로하는 잔혹한 거울과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접한 동료들은 슬픔 대신 승진과 인사이동이라는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합니다. 조문객들은 형식적인 슬픔을 표현하는 데 급급하고, 아내조차 남편의 끔찍한 고통보다는 국가로부터 받을 연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생애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며, 따라서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끌려 그들의 견해와 습관을 받아들이고, 평생 사회적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요약했습니다. 그의 집 인테리어는 자신의 계급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았음에도 그는 그것이 특별하고 우아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완벽하게 평범했던 것입니다. 불쾌한 것은 피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승
글쓰기 숙제를 내주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챗GPT부터 검색해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글쓰기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는 교사들이 많습니다. 여러 직종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전에는 힘들게 고민하고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인공지능(AI)이 쉽게 알려준다는 것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AI 때문에 글쓰기의 욕망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 쓴 것,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AI의 힘을 빌려 글을 써온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유독 마음을 울리는 일은 결국 인간의 글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글쓰기 수업을 해보면 ‘한 권의 책 완성하기, 작가 되기, 에세이 쓰기’ 등 타이틀은 계속 변해도 ‘진심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쓰는 용기’나 ‘감수성 수업’이라는 책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저는 글쓰기 수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모종의 희망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AI가
검찰개혁은 우리 사회의 오랜 화두였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피해자를 위한 정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찾기 위한 길은 더욱 멀게 느껴진다. 정의로운 처벌도 중요하지만 처벌 이후의 삶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법이 단지 잘못한 자에게 처벌을 내리는 차가움을 넘어 더 나은 삶을 위한 회복의 따스함을 지닐 수는 없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를 읽게 되었다. 법원은 슬프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는 말, 눈물 그렁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울고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아파하는 사람들끼리 간신히 서로 보호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넘어, 강자와 약자의 경계선을 치워버리고 모두가 서로를 돕는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처벌하는 정의를 넘어선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야말로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궁극적인 길임을 믿는다.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회복적 정의는 범죄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관계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처벌만 내리고 범법자만 가두면, 피해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라질 직업은 무엇일까? AI시대에 문학과 글쓰기는 어떻게 바뀔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 요즘입니다. ‘인공지능 시대, 작가로 살아온 나는 어떻게 다르게 써야 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은 ‘허(Her)’라는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과 슬픔이 떠올랐습니다. 인공지능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져 실제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는 주인공이 너무 안쓰럽기도 하면서 저런 현상이 결코 멀지 않은 미래에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그런 현상이 일어났네요. 이제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챗GPT에 실제로 의지하고, 심지어 친구나 연인이나 가족보다 더 친근감을 느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 없이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이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이 트라우마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인간을 소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트라우마를 통제할 수 없고, 오히려 트라우마에 지배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트라우마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건강한 마음의 방파제를 쌓아야 합니다. 바로 그 방파제가 회복탄력성입니다. 상처를 받았어도 다시 일어서는 마음의 힘, 그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입니다.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가 ‘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의 힘을 실험해 보는 것입니다. 출근길 교통체증 때문에 매일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매일 1시간 일찍 자고 1시간 일찍 일어나 일찍 출근하면 차도 덜 막히고 아침에 운동할 시간도 벌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무조건 세수하기도 전에 글을 쓰는 훈련인 ‘모닝페이지’는 회복탄력성 훈련에 매우 좋습니다. 아무리 힘든 날에도
대통령 탄핵 정국이 장기화되면서 둘로 갈린 세상의 혼란에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함구하던 사람까지도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질문공세를 퍼부으니 더욱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려워진다. 이 사회는 돌이킬 수 없이 두 쪽으로 나뉘어져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갈림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역사는 결국 민주주의와 정의의 승리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지도자는 기득권을 늘리는 데 힘을 쏟지 않고 천차만별의 차이를 지닌 국민들이 저마다 개성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거대한 자율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 시끄러울 때 마음의 등불이 될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1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한 메리앤 버드 주교의 연설은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대화하는 진정
2024년 12월 3일 밤의 대혼란을 우리는 결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어떤 비상시국도 아닌 상황에서 국민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 백척간두 위기에 선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계엄’이라는 말에 집단적 트라우마를 지닌 국민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비상계엄 소식을 듣는 순간 ‘죽음’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권력의 눈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나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본능적 공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이겨내고 있다. 12월 4일 새벽 국회의사당 앞.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계엄군에게 돌아가라며 간곡하게 설득하는 시민들이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안세영 선수가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미처 온 국민이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선수와 협회 사이의 갈등’이 크게 이슈화됐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며 부상의 고통을 견디고 맹훈련을 거듭했다는 안 선수의 고백이 못내 가슴 아팠다. 누군가 그토록 힘들게 금메달을 따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나 젊은이들의 간절한 목소리에는 귀 기울여주어야 한다. 안 선수의 고군분투를 바라보며 나는 우리 사회가 ‘아랫목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목이란 춥고 힘들 때마다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던가. 학교에 다녀오면 어른들이 ‘아랫목으로 어서 들어오라’며 이불 속으로 나를 밀어넣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날이면 바로 그
고성능 스포츠카가 대로를 질주하며 커다란 굉음을 낼 때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소리를 내는 거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좋은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속도와 굉음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돌출적인 행동의 원인을 ‘거대 자아’의 폭발로 본다. 눈에 보이는 자아의 모습을 거대하게 부풀려 사실은 속상한 자아, 슬픈 자아, 스트레스로 가득한 자아를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또 다른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욕망의 대체재로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들은 반드시 힘겨운 투쟁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값비싼 스포츠카나 화려한 명품으로 ‘사실은 괜찮지 않은 나’를 감추려는 기획은
봄이 유난히도 더디게 찾아오는 올해였다. ‘벚꽃 없는 벚꽃 축제’라며 아직 피지 않은 벚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느리디느린 봄꽃 소식이 오히려 기다림의 설렘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오늘은 피었으려나, 내일은 꽃봉오리가 솟아오르려나.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꽃봉오리 하나하나의 기미가 더욱 애틋해진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국내외 정치 상황은 불안하고, 일자리는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이 땅의 젊은이들은 마음껏 사랑하고, 일하고, 타오를 기회도 없었던 자신의 숨은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 봄을 아쉬워하다가 바로 이 문장을 만났다. “세상 모든 꽃을 잘라버릴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문장이다. 나는 비로소 이 감질나는 봄꽃의 기다림이 나를 괴롭히기보다
매일 아침의 감정과 상태가 시시각각 바뀌기에, 자신의 마음이 싫어질 때가 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왜 그런 수치심과 굴욕감을 잊어버리지 못할까. 왜 슬픔은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일까. 왜 어떤 날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픈 걸까. 그런데 페르시아 시인 루미(1207~1273)는 ‘게스트하우스’라는 시에서 우리 몸이 날마다 새로운 손님을 받아주는 게스트하우스라고 이야기한다. 시시각각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모든 감정까지도 환영하고, 기쁘게 맞이하라는 것이다. “기쁨, 우울, 비열함, 어떤 순간적인 깨달음이/예기치 않은 방문객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을 모두 환영하고 기쁘게 맞이하세요! /비록 그들이 슬픔의 무리일지라도,/그들이 당신의 집을 폭력적으로 쓸어버리고/ 당신의
사랑받기를 포기한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첫 번째 기억은 ‘부모는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던 어린 시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지만, 내 안에 ‘아직 사랑받지 못한 영원한 내면아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안타까운 내면아이를 일깨워준 작품이 바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아이’다. 주인공은 아직 어린 소녀지만 어른들의 감정을 매우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엄마가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뒤, 소녀는 친척집인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다. 킨셀라 부부는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보살펴주고, 아이는 킨셀라 부부에게 죽은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에 대한 사랑은 단지 잃어버린 아들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 하나뿐인 이 소녀’ 그 자체를 향한 사랑으로 바뀌
화가 카라바지오가 그린 ‘글을 쓰는 성(聖) 제롬’이라는 작품에는 책상 위 해골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마치 사생결단을 하듯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사람 나 꼭 닮지 않았어?” 내 말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거참, 너는 글 쓰는 사람만 보면 다 너 닮았다니?”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딱 잡아떼지만, 허를 찔린 느낌이다. 내가 무턱대고 좋아서 엎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에만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딜 가든 책 읽는 사람, 종이 위에 기록된 무언가를 열심히 읽는 사람만 보면,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한다. 특히 성 제롬에게 내가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절박함 때문이다. 그는 일부러 해골을 눈앞에 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