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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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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울경제 정민정 기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94년 7월 21일 토니 블레어가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다. 당시 노동당은 18년간 보수당에 패배해 무기력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불과 41세에 야당 총재가 된 블레어는 기존 좌파의 문법을 해체했다. “기업을 강조하는 대처가 옳았다”며 노동당 당헌 4조에서 산업의 국유화를 명시한 구절을 없앴다. 노동당은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닌 ‘국민의 정당’이라고 선포하며 ‘신노동당’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경제발전 없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하다”며 ‘제3의 길’로 수렴되는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덕분에 1997년 총선에서 압승했고 다우닝 10번가로 들어갔다. 블레어 집권 기간 영국은 경제 호황, 고용 확대, 공공투자 증가, 아동과 노인 빈곤 감소, 아일랜드 협상 타결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그는 10
2012년 5월 미국의 대형 유통 업체인 타깃이 한 달 안에 아마존의 태블릿PC인 킨들과 킨들파이어를 매장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월마트도 킨들 판매를 중단했다. 온라인 쇼핑이 가능한 킨들파이어가 오프라인 기반을 잠식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조지 드레이퍼 데이턴(1857~1938년)이 설립한 ‘데이턴즈드라이굿즈스토어(데이턴백화점)’가 타깃의 모태다.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사업을 했던 데이턴은 1901년 미니애폴리스에 6층 건물을 세워 ‘굿펠로앤코’라는 백화점을 입점시켰다. 이듬해 백화점 대표가 은퇴하자 지분을 전량 매입해 백화점 이름을 ‘데이턴즈드라이굿즈’로 바꿨다. 1960년대 들어 데이턴 경영진은 ‘대형 할인’ 개념을 접목한 새 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사업이 잘 되던 데이턴백화점 을 그대로 두고 1962년
만화경
3월 튀르키예(터키)의 마르마라해와 지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해협을 가로질러 ‘차나칼레 대교’가 개통됐다. 전체 길이가 3563m, 주탑 사이 거리는 2033m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다. 우리 기업인 DL이앤씨와 SK에코플랜트가 완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르다넬스해협은 서유럽의 갈리폴리 반도와 소아시아 사이에 있는 좁고 긴 해협이다. 길이는 60㎞에 달하지만 폭은 1~6㎞밖에 되지 않는다. 다르다넬스는 그리스 시대 식민 도시였던 다르다누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2세는 다르다넬스해협에 배다리를 놓고 건너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유목민에게 패배해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 정복에 본격 나선 것도 이 해협을 건너면서부터다. 이 해협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갈리폴리 전투의 무대였다. 191
지난해 12월 28일 중국 최대 동영상 플랫폼인 더우인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오후 8시부터 생방송 판매가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예고 영상 속의 쇼호스트를 보고 놀랐다. ‘학원 재벌’로 유명한 위민훙 대표였기 때문이다. 1962년 중국 장쑤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위 대표는 삼수 끝에 베이징대 서양어과에 합격했다. 기쁨도 잠시, 실패의 연속이었다. 지방 토박이인 탓에 표준어인 베이징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영어 구사 능력도 떨어져 대학 성적이 내내 하위권에 머물렀다. 유학을 준비했지만 그 역시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1985년 대학 졸업 후 유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설 토플 강좌를 개설했다가 대학에서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학 붐을 타고 영어 교육의 사업성이 크다는 점을 간파하고 1993년 신둥팡(新東方
출범한 지 40여 일이 지난 윤석열 정부 앞에 높인 상황은 녹록지 않다. 성장 동력은 꺼져가고 물가 급등과 경기 둔화 등의 먹구름까지 몰려오고 있다. 생산·소비·투자라는 3대 경제지표가 동시에 하락하면서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이 현실화한다는 경고음이 요란하다. 그런 점에서 차기 총선까지 남은 1년 10개월이 대한민국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 동력을 재점화할 수 있느냐를 가름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20일 서울경제와 만나 “총체적 복합 위기에서는 최선의 정책을 만들어내고 실천하는 능력이 핵심”이라며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최고 중의 최고)를 투입해 비상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모래 위에 지지 기반을 세운 국민의힘이 착각하고 집안 싸움이나 벌이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
2008년 5월 당시 리먼브러더스의 회계 처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매도 포지션을 취한 헤지펀드 매니저가 있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업계의 관심은 그에게 집중됐다. 주인공은 데이비드 아인혼 그린라이트캐피털 회장이었다. 리먼의 파산으로 그는 단번에 헤지펀드 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아인혼은 1968년 미국 뉴저지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표적 아이비리그로 꼽히는 코넬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뒤 1996년 자본금 90만 달러(약 10억 원)로 그린라이트캐피털을 설립했다. 창업 이듬해인 1997년 57.9%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회사 설립 이후 10년 동안 연간 평균 수익률이 26%에 달할 정도로 그는 탁월한 투자 능력을 보여줬다. 아인혼은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으로 더욱 유명하다. 2001년 당시 투자 콘퍼런스에서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우왕좌왕했던 일본 정부와 달리 일본항공(JAL)은 탁월한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 JAL 경영진은 지진 당일에 비상 체제를 가동해 이튿날부터 후쿠시마 인근 지역에 임시 항공편을 투입했다. 퇴역이 임박한 항공기까지 총동원해 4개월간 피해 지역에서 20만여 명을 실어 날랐다.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혔던 1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민한 대응이었다. 1951년 설립돼 ‘반관반민’ 형태로 운영되던 JAL은 경제 급성장과 엔화 가치 상승세를 타고 승승장구했다. 정부는 1987년 민영화 이후에도 국민 기업을 내세워 1% 이상의 대주주 지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낙하산 인사’가 판쳤고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는 도를 넘었다. 2002년 재팬에어시스템(JAS)과의 합병도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누
강한 팬덤은 정치인의 로망이다. 팬덤은 영웅 서사이자 신화다. 신화를 가진 부족, 즉 팬덤으로 무장한 정치인은 강력한 지지가 보장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원조다.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을 태풍으로 만들었고 ‘노무현 당선’이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노 전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의 당선 뒤에는 열성 지지자들의 팬심이 있었다. ‘명박사랑(이명박)’ ‘박사모(박근혜)’ ‘문빠(문재인)’ ‘윤사모(윤석열)’ 등이다. 지난 20년 동안 좌파 진영은 노사모-문빠-개딸로, 우파 진영은 박사모-태극기부대-극성 이대남으로 이어졌다. 진영 대결이 촉발한 팬덤 정치는 혐오와 분노를 부추겼고 분열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 특히나 0.73%포인트라는 역대 최소 득표 차를 기록한 20대 대선을 거치며 진보도 보수도 아
2014년 6월 일본. 한 기업의 외국인 대표 선임 소식에 제약계가 들썩거렸다. 2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다케다제약이 크리스토프 웨버 당시 GSK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야스치카 당시 다케다제약 대표는 “일본 시장은 성장 둔화로 뒤처지고 있어서 이를 타개할 방법은 ‘글로벌’밖에 없다”며 외국인 대표 영입을 밀어붙였다. 다케다제약의 모태는 1781년 다케다 초베이(武田長兵衛)가 개업한 약품 가게인 오미야(近江屋)다. 나라현 출신의 다케다는 약재 도매상 오미야 기스케의 도제로 들어가 일을 배운 뒤 32세에 독립했다. 다케다는 독립할 때 사업의 반을 떼준 오미야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가게 이름을 오미야로 지었다. 그 뒤 자손들이 대대로 경영하며 가업을 키웠다. 이 회사는 1895년 영국·미
2018년 2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19인의 암호화폐 부호’에 중국계 캐나다인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리플’ 창시자 크리스 라슨, ‘이더리움’ 창업자 조지프 루빈에 이어 3위에 오른 인사는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의 설립자인 자오창펑이었다. 자오창펑은 1977년 중국 동부 장쑤성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후반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가 정치적 이유로 추방되면서 온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다. 그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주유소에서 밤샘 근무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자리한 맥길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도쿄와 뉴욕 등에서 선물거래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인생 경로는 비트코인에 눈을 뜨면서 바뀌었다. 그는 2013년 상하이에서 친
청론직설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북한의 미사일 도발 및 7차 핵실험 가능성, 미중 전략 경쟁 가속화 등으로 어느 때보다 크게 요동치는 외교 안보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신(新)냉전 시대에 닻을 올린 새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면서도 원칙을 지키는 균형 감각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외교 안보 분야의 대표적 싱크탱크 수장인 이상현 세종연구소장은 11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우 북한에 올인하다 보니 중국을 지나치게 의식했고 대미·대일 외교 성적표는 부진했다”면서 “새 정부는 다양화, 적절한 균형감, 동맹을 중시하되 중견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외교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한 ‘한미 포괄적 전략 동맹’ 강화와 관련해서는 “방향은 맞지만 일방적으로 미국을 추
2016년 11월 미국 대선이 끝난 뒤 피터 틸 팰런티어 회장의 거취에 시선이 집중됐다. 대선 기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던 만큼 새 정부에서 중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워싱턴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은 관심 없다”고 일축했다. 1967년 독일에서 태어난 틸은 한 살 때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스탠퍼드대와 대학원에서 각각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이어 뉴욕의 한 로펌에서 일했으나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7개월 만에 변호사 생활을 그만둔 틸은 1998년 맥스 레브친과 함께 세계 최초의 핀테크 업체인 페이팔을 창업했다. 이후 유사 서비스인 엑스닷컴을 인수하면서 일론 머스크를 경영진으로 맞이했다. 2002년 틸을 비롯한 공동 창업자들은 이베이에 회사를 매각해 엄청난 돈
2009년 6월 18일 저녁 노신사가 뉴욕 대법원 법정에 들어서자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90세 현직 검사장의 은퇴를 앞두고 마련된 감사패 헌정식에 초대받은 법조인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화이트칼라 범죄 수사의 아버지’로 불렸던 로버트 모겐소(1919~2019)가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모겐소는 1948년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로펌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연방검찰청인 뉴욕남부검찰청의 초대 검사장으로 임명돼 9년 동안 검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주가 조작, 공직자 뇌물 등의 범죄를 주로 다뤘다. 이어 1975년부터 35년 동안 뉴욕 맨해튼지검 검사장을 지내며 ‘최장수 검사장’ 기록을 세웠다. 지방검찰청 검사장은 4년마다 직선제로 뽑는데 무려 9번이나 당선되며 90세까지 검사장을 지냈다. 모겐소는
2018년 6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북한의 안전 보장을,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미 국방정보국(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은 ‘북한은 핵 포기 의사가 없을 뿐 아니라 외려 핵폭탄 제조 시설의 존재에 대해 미국 측을 속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방정보국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이다. 1916년생인 맥나마라는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을 마치고 포드자동차에 입사해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경제통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방장관 지명을 놓고 경험이 풍부한 관료 출신을 고려하다가 민간 출신이자 공화당
글로벌 금융위기가 고조되던 2008년 9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이름도 낯선 중국 업체의 지분 10%를 사들였다. 일각에서는 ‘투자의 귀재’가 감각을 잃은 게 아니냐는 혹평도 나왔지만 해당 기업의 주가가 10배 이상 치솟으며 남다른 안목을 증명했다. 현재 세계 전기차 시장점유율 4위인 BYD다. BYD의 창업자인 왕촨푸는 1966년 안후이성 농촌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지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의 형도 학업을 관두고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중등전문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형은 그에게 “공부만이 유일하게 살길”이라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형의 헌신에 힘입어 1983년 중난대의 전신인 중난채광야금대학 야금물리화학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