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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대우 회장 별세]대우그룹 해체 후 20년…옛 '대우' DNA 가진 계열사들 현황은
산업 기업 2019.12.10 10:15:13현재 ‘대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대우건설(047040),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042660)(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006800)(옛 대우증권) 등이 있다. 이들은 주인이 바뀐 탓에 ‘대우’라는 정체성은 희미해졌지만,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이중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이 인수를 추진하는 터라 인수 후 ‘대우’라는 이름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한때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성장한 대우그룹은 2000년 4월 해체됐다. 9일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섬유회사를 시작으로 국내 최대 규모급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나,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우’ 이름을 쓰는 곳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대우그룹 해체 20년을 맞은 올해 4월, 대우실업이 모태인 포스코대우(047050)가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포스코그룹이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며 수년간 ‘대우’라는 이름을 썼으나 포스코그룹사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웠다. 대우자동차는 2002년 미국 GM이 인수한 뒤 ‘GM대우’로 새 출발했다. 그러나 GM이 대우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 인상 등을 고려해 2011년 대우를 빼고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꿨다. 반면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그룹으로 들어가면서 두산인프라코어로 다시 태어났다. 대우전자는 2006년 파산 후 워크아웃과 매각을 거쳐 대우일렉트로닉스, 동부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대우’라는 이름은 유지했다. 그러다 지난해 대유위니아그룹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면서 현 사명인 ‘위니아대우’를 쓰고 있다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이 1967년 3월22일 설립한 섬유 회사 대우실업에서 출발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내쇼날의류 등 섬유회사,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 대우중공업 등을 설립하며 금융, 전자, 중공업 등 분야로까지 규모를 키웠다. 특히 대우그룹은 1981년 대우개발과 대우실업을 합병한 ㈜대우가 출범해 대한전선의 가전 분야를 인수하고, 대우자동차로 자동차 사업에까지 발을 넓히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1993년 ‘세계 경영’을 선언하며 199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다. 대우그룹은 개발도상국, 구 공산권 국가 등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급팽창했다. 정부의 지원이 대우그룹의 급속한 성장을 뒷받침했고, 대우그룹은 출범 이후 30년 만에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박시진기자 see1205@@sedaily.com -
[김우중 대우 회장 별세]‘세계경영’ 김우중이 세상에 남긴 말들
산업 기업 2019.12.10 09:58:48“나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꿈이요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내가 살면서 직접 겪고 깨달은 바를 들려주기를 바라왔다. 창가로 비쳐드는 옥포만의 달빛을 바라보며 어슴푸레 하늘이 열리는 새벽녘까지 가지런히 모은 생각 중에서 다음 세대에게 건네주고 싶은 말의 편린들을 모아보았다. 젊은이여,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지구촌이라 불릴 정도로 좁아졌지만 세상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고,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도 많다. 그 길을 가고 그 일을 해내는 용기 있는 개척자들에 의해 역사는 조금씩 전진해 온 것 아닌가. 젊은이여! 우주를 생각하고 큰 뜻을 품어보라.”(김우중 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향년 83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별세하면서 그가 세상에 남긴 말들의 의미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창업 후 수출만으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켜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78년 사재를 출연해 대우재단을 설립하고 낙도·오지 의료지원사업을 펼쳤으며, 1980년에는 개인 재산 전액을 추가로 출연해 기초학문연구지원사업을 시행했다. 1983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3년마다 수여하는 이른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했다. 이같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은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1989년 펴내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했다. 여기에는 세계를 무대로 현장을 누비며 굴지의 기업을 일으켜 세운 김 전 회장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생생한 삶의 교훈과 인생철학은 물론 새로운 길을 향해 용기 있게 개척해 나가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에세이집에 제시된 ‘세계 경영’은 1990년대 들어서 빛을 발했다. 김 전 회장은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신흥시장 진출에 나서며 대우를 개발도상국 기업 중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 바로 김 전 회장이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와중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아 경제 회생을 위해 노력했으나 단기 유동성 위기, 경제 관료와의 관계 악화로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는 이후 대우그룹 내부에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포토스토리로 보는 김우중 회장 83년 '영욕의 삶'
산업 기업 2019.12.10 09:58:01김우중 전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반복하다 최근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2017년 3월 열린 대우 창업 50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던 그는 만 30세가 되던 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출범시킨 그는 세계경영을 지향하며 단숨에 재계 2위 그룹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고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 다음은 사진으로 보는 고인의 생전 모습들이다.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
[김우중 대우 회장 별세]전경련, “김우중은 한국 산업화·세계화 이끈 선구자”
산업 기업 2019.12.10 09:52:03전국경제인연합회는 10일 “우리 기업 글로벌 경영의 효시이자 한국 경제 발전 성공의 주역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하신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이날 김 전 회장 별세 관련 논평을 내고 “김 전 회장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였다”면서 “냉전이 끝나자 가장 먼저 동유럽으로 달려가 세계경영의 씨앗을 뿌렸고 중남미, 중국, 베트남, 아프리카 등 당시 왕래도 드문 낯선 땅에 가장 먼저 진출해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알렸다”고 평가했다. 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씀처럼 세계를 누비며 한국을 알린 김 전 회장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영토는 한층 더 넓어질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전경련은 “김 전 회장의 열정적인 경영철학은 여전히 우리 경제계에 큰 발자취로 남아있다”면서 “금융, 건설,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우리 주력산업에서 굴지의 기업을 이룩했고 그 기업들은 현재도 우리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무엇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장 앞서서 개척했던 김 전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경제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귀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경련은 마지막으로 “우리 경제계는 고인이 일생을 통해 보여줬던 창조적 도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침체된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김우중 대우 회장 별세]'샐러리맨의 신화' 보여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산업 기업 2019.12.10 09:37:12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사진) 전 대우그룹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재계 2위 그룹 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재계에서는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을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분류한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으며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성공을 거뒀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김 전 회장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으며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으며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만든다. 대우전자는 이후 ‘탱크경영’ 등 품질을 앞세운 마케팅으로 국내 전자업계에 이름을 알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김 전 회장을 각별히 챙겼으며 사업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타고 해외 진출에 성공하며 대우를 세계에 알렸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경영에 매진했다. 하지만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되레 개혁 대상으로 내몰렸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으며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유동성 위기에 내몰렸다. 특히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이후 유동성 위기는 한층 심화됐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김 전 회장측은 추징금을 아직 납부하지 못했다. 김 전 회장은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후였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빠르게 비상한 만큼 빠르게 추락한...김우중의 대우
산업 기업 2019.12.10 09:20:30대우그룹은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을 상징한다 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으나 또 그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10평 남짓 사무실에서 출발한 대우그룹은 한 때 국내 대기업 중 자산규모 2위까지 올라섰으나 창립 30여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해체됐다. 대우그룹은 1967년 3월 22일 대우실업이 문을 열며 시작됐다.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라 이른바 ‘트리코트 김’이라 불리던 청년 김우중은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빌려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내다 팔았다. 김 전 회장의 수완과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을 양날개로 달고 대우실업은 급성장했으며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다계열, 다업종’ 확장에 나섰다. 당시 사업 확장 속도는 숨가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다. 대우는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대우그룹의 상징이던 서울역 대우센터 빌딩은 1977년 완공했으며 지상 23층 규모의 사옥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같은 성장 일변도의 정책은 1990년대 들어서도 유지된다. 1993년에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당시 대우맨들의 영업력은 유럽 내에서도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릴 정도였다. 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쌍용차도 인수했다. 이 같은 공격적 확장을 바탕으로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 2위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당시 국내 10만5,000여명, 해외사업장 21만9,000여명으로 임직원이 30만명이 넘어서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외형 확장이 무리한 차입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대마불사’ 신화는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차입경영의 허점이 드러났으며 외형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다. 특히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했지만 추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삼성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내주는 이른바 ‘빅딜’ 계획이 실패하며 이듬해 8월엔 12개 주요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다. 2000년에는 수십조원 규모의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재계 관계자는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성장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국가 전체를 휘청이게 한 만큼 공과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김우중 대우 회장 별세]재계 곳곳에 남아있는 대우그룹의 흔적
산업 기업 2019.12.10 09:07:36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이끌었던 대우그룹은 2000년 4월 해체됐지만 명맥은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현대·삼성·LG 등과 한 때 4대 그룹으로 불렸던 만큼 국내 재계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이 1967년 3월22일 설립한 섬유 회사 대우실업에서 출발해 대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내쇼날의류 등 섬유회사를 비롯해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 대우중공업 등을 설립하며 금융, 전자, 중공업 등 분야로까지 몸집을 불렸다. 대우그룹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0년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1981년 대우개발과 대우실업을 합병한 ㈜대우가 출범했으며 1983년 대한전선의 가전 분야를 인수했다. 이어 대우자동차로 자동차 사업에까지 발을 넓혔다.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이 1993년 ‘세계 경영’을 선언하며 199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다. 김 전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자서전을 쓰며 젊은이들 사이에 ‘바람직한 창업자’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 전 회장은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 경제학과 인맥을 활용한 사업 수완이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대우그룹은 개발도상국을 비롯해 구 공산권 국가 등 해외 시장을 개척하며 급팽창했다. 정부의 지원이 대우그룹의 급속한 성장을 뒷받침 했다. 대우실업에서 출발한지 30여년 만인 1998년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특히 당시 대우 영업맨들의 실력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워크아웃 후 해체됐다. 이후 계열사들은 공중분해됐고 ‘대우’ 이름을 쓰는 곳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현재 사명에 ‘대우’가 들어간 회사는 대우건설,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등이 있다. 이중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이 인수를 추진하고 있어 인수 후 ‘대우’라는 이름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우그룹 해체 20년을 맞은 올해 4월 대우실업이 모태인 포스코대우가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포스코그룹이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며 수년간 ‘대우’라는 이름을 썼으나 포스코그룹사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웠다. 대우자동차는 2002년 미국 GM이 인수한 뒤 ‘GM대우’로 새 출발했다. 그러나 GM이 대우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 인상 등을 고려해 2011년 대우를 빼고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꿨다.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그룹으로 들어가면서 두산인프라코어로 다시 태어났다. 대우전자는 2006년 파산 후 워크아웃과 매각을 거쳐 대우일렉트로닉스, 동부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대우’는 유지했다. 그러다 지난해 대유위니아그룹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면서 현 사명인 ‘위니아대우’를 쓰고 있다.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 들은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해마다 창립기념일인 3월22일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김 전 회장은 2017년 50주년, 지난해 51주년 행사에 참석했었다. 특히 지난해 3월22일 열린 51주년 기념식이 김 전 회장이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달라”는 유지를 남겼다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샐러리맨 신화'에서 도피자로, 김우중 그는 누구인가?
산업 기업 2019.12.10 08:59:41한때 대우를 재계 2위 그룹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만 30세였던 지난 1967년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자본금 500만원 뿐이었던 대우는 출범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원단과 제품 수출 실적을 올리며 시장을 넓혀나갔다. 주로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의 기반을 닦아 고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또한,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고인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후 대우의 성장은 순풍을 탄 배와 같았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이 결과 대우그룹은 창업 15년 만에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80~90년대에도 대우의 성장세는 거침 없었다.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국가 부도로 몰아넣었던 외환 위기 앞에 대우는 무기력했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이후 김 전 회장은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하지만 고인은 17조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9일 별세…향년 83세
산업 기업 2019.12.10 01:35:01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반복하다 최근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2017년 3월 열린 대우 창업 50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조권형기자 buzz@@sedaily.com -
김우중 전 대우회장 아주대병원 입원 중…건강 나빠져
산업 기업 2019.12.09 20:06:21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원 치료를 받던 중 건강 상태가 나빠져 다시 입원한 것으로 보인다. 9일 재계 등에 따르면 김 전 대우그룹 회장은 현재 아주대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에도 건강이 악화돼 아주대 병원에서 12월 말까지 치료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 이후에는 통원 치료를 받았으나 최근 건강이 나빠져 다시 입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2017년 하반기까지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한국의 젊은 사업가들을 양성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귀국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 그룹 비서실 출신들이 여는 생일축하모임에도 지난해 처음으로 불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은 기억력이 흐려지는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권형·안현덕기자 buz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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