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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 장례는 가족장으로…"대외 조문 사양"
산업 기업 2020.10.25 10:46:06삼성은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전자(005930) 회장에 대한 장례를 유족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의 우려가 있는 시기라는 점을 고려해 조문도 제한적으로 받는다. 다만 아직 몇 일장으로 치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날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빈소를 마련하고 있다. 빈소가 차려지면 가족과 친지에 한해 조문을 받고 나머지 장례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특실에는 이 회장의 마지막을 위한 빈소가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이날 새벽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20층 특실에서 집중치료를 받던 중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 2014년 5월 10일 오후 자택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진 이 회장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한 차례 위기상황을 넘겼다. 6년 넘게 이어진 입원 생활 가운데 일부 언론은 ‘이 회장이 병원 침대에 앉아 TV를 시청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는 등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으나, 이 회장은 예전처럼 활발한 대외적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회장의 치료를 위해 삼성서울병원은 전담팀을 꾸려 관리해왔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난 후 고인은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내 선영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
[이건희 별세] "돈받고 불량품 만드나"…'애니콜 화형식'으로 더 강해진 삼성전자
산업 기업 2020.10.25 10:34:17삼성전자(005930)는 1988년 국내 최초로 자체 개발한 휴대전화를 내놓았다. 당시 국내외 시장은 모토로라가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25일 별세한 고(故)이건희 회장은 당시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며 신수종사업으로 휴대전화를 지목했다. 이에 따라 제품개발에 박차를 가한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애니콜’ 브랜드를 만들어 첫 제품을 내놨고 수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30%를 장악했다. 하지만 삼성은 모토로라가 차지하고 있는 시장점유율을 가져오기 위해 질의 개념이 아닌 양의 개념으로 휴대폰을 만들었다. 무리한 제품출시로 양적 성장만 추구한 결과 그해 삼성전자 휴대폰의 불량률은 11.8%까지 치솟았다. 높은 불량률을 보고받은 이건희 회장은 크게 화를 냈다. 이 회장은 불과 1년 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독일까지 가서 ‘질의 경영’을 부르짖었는데 아직도 삼성은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신경영 선언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질보다 매출과 성장위주의 양적 팽창 분위기였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주라고 지시했다. 무려 15만 대에 달하는 불량품이 수거됐다. 회사의 손해가 컸다. 1995년 3월 9일 이 회장은 수거된 15만 대의 휴대폰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으라고 지시했다.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 명이 전화기를 내리쳤다. 조각난 휴대폰에 불까지 붙였다. 삼성전자 직원들은 500억 원어치의 휴대폰들이 녹아 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조를 담당한 여직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제품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오랫동안 회자됐던 ‘휴대폰 화형식’이다. 당시 이를 지켜본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 자식 같은 무선전화기가 타는 것 같았다. 그 화형식이 계기였다. 우리 가슴 속에 불량에 대한 안이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안 남기고 다 태워버렸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지금의 삼성은 거기서 시작됐다.” 그 해 삼성전자 애니콜은 국내시장 점유율 52%를 기록하며 모토로라와 노키아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2011년 삼성전자는 애플을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이건희 별세] 삼성상회 3남에서 글로벌 기업 경영자로
산업 기업 2020.10.25 10:30:29고(故)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맹희와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고 이 사업이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 등지로 파는 무역회사로 점차 자리를 잡아나고 있던 터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 바빴다. 그 바람에 어머니(박두을)는 이건희가 젖을 떼자마자 이 막내아들을 의령의 친가로 보냈다. 그래서 이건희는 할머니가 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해방 후가 돼서야 이건희는 처음으로 부모 형제와 함께하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1947년에 이병철이 사업을 확장하려고 서울로 이사를 했고 2년 뒤인 1949년에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이병철 일가는 공산치하에서 3개월동안 모진 어려움을 겪는다. 이병철이 타도대상인 자본가였기 때문이다. 서울 수복 후에 이병철 일가는 마산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이건희는 다시 초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금방 대구로 이사를 갔고, 이건희는 다시 또 전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구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병철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사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만 두번 전학을 했다. 이렇게 해서 초등학교때 모두 다섯번이나 전학을 한 것이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이전 1953년 아버지는 이건희에게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며 일본 도쿄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건희의 형 맹희와 창희는 이미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이건희는 작은형 창희와 함께 일본인 가정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바로 위 형 창희와는 9살 차이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같이 놀 친구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사색과 공상을 즐기며 무엇인가 흥미를 느끼면 무섭게 파고드는 성향이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에 영화, 개, 자동차, 전자제품 등에 빠져들었다. 이건희 회장은 예전 <신동아> 등과의 인터뷰에서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되어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하고 또 깊이 하게 됐다”고 자신의 성격을 설명했다. 일본에서 소년 이건희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다. 초등학교 2년, 중학교 1년, 3년간 보았던 영화를 합산하면 1,200~1,300편이 된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지 “만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영화사를 했거나 감독을 했을 것”이라고 이건희 회장은 말한다. 소년 이건희는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귀국한 뒤 서울대 사대부중을 거쳐 사대부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레슬링부에 들어갔다. 레슬링부에서 그는 단체 활동을 배웠다. 건희는 사대부고를 졸업하고 1961년에 연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이건희를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자기가 졸업한 와세다대학교 상학부였다. 선진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1965년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부전공은 매스컴이었다. 이 즈음 부인 홍라희 여사와 만났다. 1967년 1월 두 사람은 약혼하고 4월 30일 결혼했다. 외롭고 힘겹게 유학생의 시간을 지내온 어건희는 1966년 귀국해서 삼성빌딩의 비서실에 출근했다. 견습사원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삼성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붉은색 밑줄을 긋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한눈에 기사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희는 이런 생활을 그다지 오래 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 1968년 말 아버지는 미국에 나가 있던 이건희를 불렀다. 아버지는 이 막내 아들에게 중앙매스컴(나중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이사로 임명했다. 이건희가 공식적을 삼성이라는 조직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이건희의 첫 사업은 반도체였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한다. 이병철의 후계자로 공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병철은 이미 오래 전 이건희를 후계자로 낙점햇다. 이병철은 1976년 9월 위암 판정을 받았다. 도쿄의 암연구소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가지 전 가족들을 용인의 별장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발언한다. 후계자가 된 이건희는 아버지로부터 특명을 받는다.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 11월 28일 유공은 선경에 돌아간다. 그 뒤 이건희는 해외 자원개발로 눈을 돌려 말레이시아의 석유회사 페트로나스와 삼성물산 등 4개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원유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또 알래스카 베링리버 탄광 개발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2차 석유 파동이 끝나고 원유가가 안정되면서 빛을 잃었다. 이건희는 동양방송국(TBC)을 신군부에 뺏긴다. 이건희에게 동양방송국은 각별한 회사였다. 이건희가 삼성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그곳이었고, 그래서 쏟은 애정과 노력은 남달랐다.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건희는 낙담했다. 그래서 그는 개개인이 의사를 무시하고 획일성만을 강요하는 군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군사 문화로 인해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 보다 명령을 받은 데 익숙해 졌다.” 1986년 5월 이병철의 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미열을 동반한 감기 기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왼쪽 폐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검사 결과 암으로 판명됐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이 사망하고 이건희가 삼성을 넘겨 받는다. 그의 공식 취임은 12월 1일 있었다. 이날 취임사에서 이건희 회장은 “미래 지향적이고 도적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은 바뀌지 않았다. 삼성은 아직 이건희의 것이 아니라 이병철이 것이었다. 법률적으로 오너가 됐지만 삼성은 그가 만든 조직이 아니었다. 9년 동안 부회장으로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최고 경영자로서 지휘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계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몇 몇가지 일을 했지만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조직 안팎에서는 이건희의 경영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건희는 답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해에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줄었다. 이건희는 삼섬 그룹 권력이 핵심인 비서실에 칼을 댔다. 1990년대 초반 비서실을 축소하고 비서실장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이어 1990년 12월 아버지 3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비서실의 수장 소병해를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적으로 전출시켰다. 92년 누이들과의 재산 분배를 마무리했다. 1987년 12월 1일에 취임한 이건희는 5년여 동안 국내 재벌그룹 회장 가운데 가장 조용하게 보냈다. 그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들끓었다. 언제부턴가 세간에선 그를 ‘은둔의 황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1993년에 들어서자 이건희 회장은 그 동안 준비한 조직적 성과와 이론적인 방향성을 들고 경영일선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3월 22일 월요일, 그룹 창립 55주년을 맞아 기념식이 서울 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제2창업 5주년 기념사’라는 명연설을 한다. 이건희 회장은 제2창업 제2기를 선포하고 그룹의 경영 이념과 정신, 그룹 마크, 사가 등은 대대적으로 바꾸며 개혁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대중 앞에 자주 나타나 삼성 개혁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홍보했다. 5월 3일자 미국의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이건희를 선정하고 표지에 그의 얼굴을 실었으며 특집 표지기사로 삼성그룹을 다뤘다. 그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양에서 질로의 전환을 강조한 프랑크푸르트 선인 직후인 93년 6월 10일 이건희 회장은 강연을 마치고 사장단을 자기 방으로 불러 들여서 강연 내용에 대한 반응을 듣는데, 이수빈 비서실장이 “아직은 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발언하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다 내동댕이 쳤다. 삼성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스푼사건’이다. 이건희는 개혁의 드라마를 쓴 뒤 곧바로 영토확장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1993년 삼성중공업의 상용차 생산설비를 증설했으며, 93년 6월에는 분당 서현역사를 매입해서 유통사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1994년 7월에는 한국비료의 정부 보유 주식을 매입했으며, 9월에는 중형항공기 개발 사업에도 참여했다. 95년에는 영상관련 사업을 위해 삼성영상사업단을 발족시켰고, 10월 13일에는 영국 동북부 윈야드 파크의 삼성전자 복합단지 준공식을 했다. 92년 7월 삼성은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사업권을 따냈다. 1994년 12월 5일 승용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정부에서 수리한다. 95년 3월에 삼성자동차가 설립됐고 4월에 부산공장이 착공됐다. 98년 25만대, 2000년 50만대 생산 규모를 갖출 승용차 공장이었다. 하지만 판매부진으로 98년말까지 누적 적자액은 6,988억원으로 자본금(8,054억원)을 거의 잠식한 상태였다. 99년 6월 30일, 결국 삼성은 삼성자동차의 법정 관리를 신청하는 동시에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을 70만원에 평가해서 350만주(2조4,500억원)를 채권단에 증여했으며 종업원과 하청업체에 대한 위로금으로 삼성생명 주식 50만주(3,500억원)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 뒤 삼성차는 2000년 4월에 르노에 인수됐다. 97년 11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이어진 IMF는 이건희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덕분에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때고 전자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000년 사상 최대인 7조6,000억원의 이익을 실현했다. 2002년 삼성의 순이익은 11조5,000억원이었고 부채비율도 2003년 56%까지 떨어져 초유량 기업이 됐다. 신경영 선언 10년이 되는 2003년 이건희는 신년사에서 제 2의 도약을 제안한다. 2005년 7월22일 MBC방송국의 이상호 기자가 안기부 엑스파일 녹음내용을 보도했다. 엑스파일 사건은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도청한 사건인데,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2월 검찰은 엑스파일을 보도한 이상호기자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엑스파일에 거론된 떡값 검사 및 대화 당사자인 이건희나 이학수 홍석현을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2006년 2월 7일 삼성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삼성의 현안과 관련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이건희 회장이 96년 자녀들이 취득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등의 증여와 안기부 엑스파일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 깊이 사과하고 8,000억원의 사회기금을 내놓키로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삼성의 법무팀장으로 근무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2008년 1월 10일 삼성특별검사팀이 출범했다. 4월 17일 수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분식회계나 비자금,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은 모두 무혐의 처리했으며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에 대해서는 불구속 처리했다. 4월 22일 특검 수사발표가 있은 지 닷새 뒤 그는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은 삼성경영권 승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이건희는 조세포탈 혐의만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선고됐다. 2009년 12월 31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자격을 회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정부가 그를 특별 사면한다. 2010년 1월 9일 예순 여덟번째 생일날, 그는 복귀를 사실상 공식화하고 3월 24일 공식 복귀한다. 복귀 때 그는 위기론을 설파한다. 이후 4년간 이 회장은 줄곧 위기론을 역설했다. 섣부른 자만심으로 인한 글로벌 톱 삼성의 질주에 균열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당시 자택에서 이 회장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위기상황을 넘긴 뒤 10개월간 장기 입원치료를 받으며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
"천재 한 사람이 10만명 먹여 살린다”던 인재경영 철학[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0:25:15“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03년 인재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놓아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린 말이다. 바꿔 말하면 평범한 사람 10만명보다 한 사람의 천재가 낫다는 얘기다. 이는 이병철 창업주의 3대 경영이념 중 하나인 인재 제일과 맥을 같이 한다. 일류 인재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관심은 와세다대학에 재학했던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유명한 역도산과 자주 골프를 쳤다고 한다. 이외에도 일류 야쿠자들과 1년간 골프를 치며 그들의 행동을 연구한 적도 있고 사기범, 절도범 중에서도 전과 20범 이상의 최고수들을 골라 연구를 했다. 이 회장이 일류 인재에 대해 이토록 집착한 이유는 최고에게는 반드시 뭔가 다른 점이 있으므로 연구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와 관련해 “일류란 자신이나 일에 철저한 사람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을 줄 때는 사정없이 주고, 상을 줄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최고의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그만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인재 육성에 대한 호암과 이 회장의 신념과 열정은 삼성이 최고의 인재를 모집하고 더 나아가 평범한 사람도 열정을 가진 ‘삼성맨’으로 키워 내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삼성의 인재론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경기 용인시에 있는 삼성인력개발원이다. 삼성그룹에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가장 먼저 소집해 최고 인재로서의 정신 무장을 시키는 곳이다. 이 회장이 1987년 회장이 된 직후 가장 먼저 내렸던 지시도 “인력개발원(창조관)을 지으라”는 지시였다고 한다. 인재개발원은 세계 최초의 기업 내 대학인 제너럴일렉트릭(GE)의 크로톤빌연수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이 회장이 초대 원장을 맡았다. 이곳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매일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사가(社歌)와 국가를 부르며 애사정신과 애국심을 기르게 된다. 신입사원들에게 한 푼도 돈을 주지 않고 삼성 제품을 갖고 버스에 태워 연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놓은 뒤 식비와 차비를 마련해 연수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신입사원들로 조(組)를 구성해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시키거나 소속 계열사의 미래 전략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등 입시에 버금갈 정도로 혹독한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을 거친 삼성맨들은 인재 개발원에서 비로소 삼성 의식을 체화했다고 말한다. 이런 인재 교육은 신입사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계열사에 따라 다르지만 입사 후 매년 2주일간의 연수를 중견사원들도 받아야 한다. 부장급 사원에게 산악훈련을 시킬 때도 있다. 오후 8시가 지나 사방이 컴컴할 때 사원 몇 명을 조를 짜 전등과 지도만을 가지고 산을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통해 난관을 뚫어내는 방법을 배우고 리더십과 조직애를 키운다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육성하는 삼성이 원하는 인재상은 무엇일까.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내용은 이렇다. 먼저 향후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만들고 이를 통해 회사와 산업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시기상조라고 할 때 반도체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삼성전자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꿔 놓은 이 회장의 인생역정과 닮아 있는 인재론이다. 두 번째는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인재다.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재여야 한다. 애플을 일궈낸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같은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런 인재로 분류된다. 그 다음은 투철한 가치관과 조직관을 갖춘 인재, 마지막은 인간미가 있는 인재다. 이런 인재론에 이 회장의 뜻이 반영돼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훌륭한 인재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고 해도 그들을 삼성맨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와 관련해 이 회장은 2002년 11월 사장단을 불러 모아 특단의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사장단의 인사평가 점수에서 100점 중 40점은 핵심인력을 얼마나 확보했느냐로 정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후 사장들이 인재 모시기를 발등의 떨어진 불 다루듯 화급한 과제로 다뤘다. 이 회장이 직접 밝힌 인재육성에 대한 철학은 지금까지도 기업인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인재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채용해야 합니다. 기존 핵심 인력들의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인재 육성의 한 방편입니다. 인재의 조기 양성을 위해 이공계 대학생을 지원하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에서도 미국·중국·일본 등 유수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을 조기 발굴해 장학금을 지원해야 합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이건희 별세]"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 고인의 말말말
산업 기업 2020.10.25 10:24:2825일 재계의 거목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삼성의 ‘제 2의 창업’을 이끈 고인은 생전 주옥같은 말들을 남겼다. 한국 재계 역사에 깊게 새겨진 말들을 통해 고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첨단 기술 산업 분야를 더욱 넓혀 나가겠습니다.”(1987년 12월 취임사) “모든 지역전문가 출신들이 회사를 떠나도 좋다. 무조건 시행하라. 그 사람들이 삼성을 떠나면 어딜 가겠는가? 스스로 무역회사를 차리거나 다른 수출기업으로 갈 것 아닌가? 그럼 우리나라 전체에 좋은 것 아닌가. 삼성만 생각할 것 없다.”(1990년 지역전문가 제도 시행하며)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재산이 10배 더 늘어봐야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여러분이 잘되게, 회사가 잘되게, 나라가 잘되게, 여러분의 자손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다.”(1993년 2월 미국 로스엔젤리스 전자 사장단 회의)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10년을 해도 안 된다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회의) “나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남보다 나은 사람, 우수한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내놓을 수가 없다. 돈 몇 푼 나가는 것은 신경도 안 쓴다. 우수한 사람을 더 데리고 더 효율을 내면 된다.”(1993년 7월 신경영 회의) “한 가지를 천 번 하면 박사가 된다. 정보가 상식이 되고, 상식이 모여 지식이 되며 결국 지혜로 통한다. 이런 식으로 전무까지 쭉 올라오면 이것이 진정 평생직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이것은 이 세상에는 아직 없는 월급쟁이 천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새로운 도전이다.”(1993년 7월 7.4제를 시행하며) “잘못된 행정 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은 일류 국가로 도약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사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삼류, 기업은 이류다.”(1995년 4월 중국 베이징 방문)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1996년 신년사)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난다.”(2002년 6월 그룹 사장단 회의) “초음속을 돌파할 때는 재료부터 엔진까지 전부 바꿔야 한다. 2008년까지 엔진 바디의 재료를 바꾸고 파일럿부터 직원 훈련시키는 태도까지 전부 변화시켜야 한다. 휴대폰 공장이 창조적 초일류 현장이 될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개편하라.”(2004년 6월 구미공장 방문때)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경제는 샌드위치 신세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고생을 해야 하는 위치다.”(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기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2010년 3월 경영복귀를 선언하며) “제조업의 관건은 협력사 육성이다. 협력사 사장들이 자신의 재산과 인생을 모두 걸고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제대로 된 품질이 나오고 사업 경쟁력이 생긴다. 여기에 삼성의 미래가 달렸다.”(2010년 9월 협력사 경영진단 결과 보고) “지금부터 10년은 미래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21세기를 주도하며 흔들림 없이 성장하는 기업, 안심하고 일에 전념하는 기업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업구조가 선순환 되어야 하며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과 제품은 10년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과 제품이 들어서야 합니다.”(2011년 신년사) “이제 20년이 되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13년 4월 귀국하며) -
[이건희 별세]삼성, 이건희 체제서 얼마나 성장했나
산업 기업 2020.10.25 10:21:50삼성은 고(故)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매출은 87년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에서 2014년 400조원으로 무려 40배나 늘었고 종업원 수 역시 1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었다. 협력 업체까지 감안하면 600여만 명이 삼성과 관련있다. 삼성전자(005930) 단일회사가 전체 법인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나 될 정도로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이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이 회장이 이룩한 성과는 이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삼성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를 호령하고 있다. D램 반도체가 92년 세계 첫 1위가 된데 이어 낸드 플래시메모리(2002년),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2005년), 평판TV(2006년), 스마트카드IC(2006년)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삼성의 성장에는 회장-비서실(미래전략실)-계열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의 힘이 컸다. 회장이 큰 그림을 그리면 비서실에서 이를 바탕으로 실행 계획을 짜고 계열사가 실행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신규 사업 발굴에서부터 대규모 투자,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등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삼성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삼성전자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휴대폰 사업은 전자를 이루는 양대 축이다. 이 분야의 성공은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결단이 있어 가능했다. 전자사업은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이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며 시작했다. 이 회사는 84년 2월 지금의 삼성전자로 사명을 바꿨다. 1974년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당시 경영진들은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74년 12월 6일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 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부친을 설득, 반도체 사업 진출을 이끌어 낸다. 이어 1977년 미국 ICII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으며 1978년 3월에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한국반도체 공장은 말이 반도체 공장이지 트랜지스터 웨이퍼를 생산하는 조악한 수준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 장벽을 뛰어넘기란 어려웠다. 이건희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무려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미친 듯이 인력을 확보했다. 또 미국 페어차일드사를 여러 차례 방문해 기술 이전을 요청한 끝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었다. 1983년 12월 64kD램을 생산 조립까지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10년에서 4년으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이어 84년에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이 완성됐지만 반도체 사업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87년 취임 이후 이회장에게 그룹 수뇌부가 반도체 사업 포기를 건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라며 당시 임원들에게 강조했다. 다음해인 1988년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 마침내 끝났다. 256kD가격이 1.5달러에서 6달러로 치솟았다. 고 이병철 선대회장이 타계 직전 기공식을 한 3라인은 1988년 완공되자 마자 풀가동 됐다. 계열사로 있던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삼성전자는 그 해 지금까지 반도체에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84년 반도체 개발진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반도체 용량을 높이기 위해 위로 쌓아 올릴 것인지(스택방식), 아래로 파 내려 갈 것인지(트렌치 방식)를 두고 고민에 빠진 것이다. 당시 D램 세계 1위였던 도시바는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다. 이건희는 스택방식을 선택한다. 쌓는 것이 파고 내려가는 것보다 쉽다는 생각에서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4M D램 개발 경쟁에서 선진국들과 개발 격차를 좁힐 수 있었고, 16MD램에서는 선두업체와 동시에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93년 6월에는 삼성은 8인치 양산 체제를 세계 최초로 구축한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표준이었지만 이 회장은 생산량 확대가 용이한 8인치 웨이퍼 개발을 지시한다. 그 결과 삼성은 생산력에서 일본 기업을 월등하게 앞서며 세계 1위에 오른다. 이후 22년 연속으로 메모리 분야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대표적 자본 집약형 사업인 반도체의 경우 최고 경영진의 의사결정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성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변곡점마다 이 회장이 보여준 결단력은 세계시장을 석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삼성이 메모리 사장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선 데는 강력한 오너의 리더십 때문이다. 90년대 앞서나가던 NEC, 도시바, 후지쯔 등이 불안정한 업황 때문에 주저하는 와중에도 오너의 결단력으로 이들 기업의 4~5배 규모의 과감한 설비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상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D램 41.4%, 낸드플래시는 27.9%로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또 결단력으로 휴대폰을 주력으로 육성했다. 삼성은 1994년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다.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시장 진출 1년만에 글로벌 1위인 모토롤라를 제치고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애니콜 신화’를 만들었다. 삼성 휴대폰 사업은 또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피처폰 수준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며 통신시장을 뒤 흔들자 삼성은 미완성작인 옴니아 시리즈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폰에 비해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모두 떨어졌던 옴니아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경기침체까지 겹치며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쓰러져 가던 삼성의 휴대폰을 살린 것은 때마침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은 무선 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는 체질 개선으로 초강수를 뒀고, 삼성 휴대폰 기술의 총 집약체인 갤럭시S를 재빨리 선보였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만에 전세계적으로 1,000만대가 팔리면서 삼성 휴대폰 사업의 부활을 알렸다. 아이폰 천하는 아이폰과 갤럭시의 양강체제로 바뀌었다. 급기야 삼성전자는 갤럭시S 출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삼성의 스마트폰은 최근 점유율 22.4%로 전세계 1위를 차지했다. 아이폰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퇴근을 마다하고 연구실 야전침대에서 숱한 밤을 새워가며 연구한 도전정신이 신화창조로 이어졌다. 또 삼성전자는 갤럭시S3 출시를 앞두고 스마트폰 케이스 불량이 발생하자 돌연 갤럭시S3의 출시 일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곧바로 불량 스마트폰 케이스를 모두 폐기 처리했다. “불량은 암과 같다”는 이 회장의 20년 전 강연 내용이 여전히 삼성그룹 임직원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기에 가능했다. 업계관계자는 “갤럭시S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의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부품을 수입해 중국 등에서 제품을 조립한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갖추고 있어 애플에 비해 제조에 강점이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활용해 스마트폰 라인업 다양화를 시도했다. 프리미엄 제품부터 중저가 보급형 제품까지 모든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컨설팅회사의 한 간부는 “삼성전자는 부품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 강점”이라며 “10~20개 모델을 시장에 내놓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삼성전자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갤럭시S시리즈부터 삼성은 글로벌기업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세계 1위 제품을 본격적으로 늘려나간 시기도 이 때부터다. 이전까지 D램 반도체에 국한됐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제품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 회장이 취임할 당시만 해도 하이테크 산업인 전자 업종에서 삼성이 입지는 초라했다.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을 배우려 했고 미국 IBM등의 기술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일본을 배운다는 것은 베끼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소니와 파나소닉을 물론 인텔과 HP등을 제치고 오히려 이들의 거센 추격을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올해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선정한 글로벌 브랜드 랭킹에서도 삼성은 애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브랜드 가치는 약 90조원에 달했다. 더불어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철학 아래 최고의 인재를 키워내는데 집중 투자했고 10년 후에는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경영론’으로 직원들을 이끌었다. 세계적인 대학에서도 삼성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 최고의 MBA스쿨인 하버드대에서는 2004년 삼성의 반도체 성공사례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했다.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과 이후 전세계 반도체 시장 1위를 지켜내는 노력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은 MBA학생 1학년이 필수과목으로 수강생만도 1,000여 명에 달했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재계 큰별’ 타계…삼성家 가족장 치른다 [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0:17:38경제계 거목(巨木)이 스러졌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자’는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사진)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 회장은 이날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 2014년 5월 10일 오후 자택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진 이 회장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위기상황을 넘긴 뒤 줄곧 치료를 이어왔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가 끝난 후 고인은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내 선영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폐 부분의 림프암이 발병해 1999년 말∼2000년 초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은 뒤 재발 방지를 위해 매년 겨울이면 기후가 따뜻한 해외에서 지내며 각별하게 건강관리를 해왔다. 지난 2013년에도 1월 초 신년행사 후 출국해 3개월 가량 해외에 머물면서 요양과 경영구상을 하다 4월 귀국해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인사를 단행하는 등 그룹의 체질과 구조를 개선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다 갑자기 쓰러졌다. 이 회장이 입원하면서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 사업 구조조정과 새 먹거리 발굴을 진두지휘하면서 삼성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삼성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 회장이 타계하면서 그룹은 물론 한국 재계가 큰 슬픔에 잠겼다. 지난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일본 게이오대를 졸업하고 1968년 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77년 선친인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이 회장은 1979년 삼성물산(028260) 부회장에 선임돼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았다. 1987년 11월 선친이 타계하면서 그룹 회장에 오른 이 회장은 5년 뒤인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으로 임직원들에게 강도 높은 변화와 혁신을 주문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삼성은 ‘7.4’제 도입과 라인스톱제 등 ‘질(質) 경영’을 추진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회장은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기술·인재 경영을 펼쳐 삼성전자가 미국 애플과 일본 소니 등을 제치고 세계 1위 종합전자 회사로 도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1982년부터 15년 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비인기 종목인 레슬링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으며 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피선돼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69) 여사와 1남2녀가 있다. 한편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이 회장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
[이건희 별세]삼성 이재용 시대 막 올라
산업 기업 2020.10.25 10:13:07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하면서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산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이 지난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부터 대외 노출 횟수를 늘리며 경영의 보폭을 조금씩 넓혀 왔다. 이 회장의 별세로 삼성은 이제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이 특유의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한 소통 능력과 화려한 글로벌 인맥, 최근 보여준 과감한 모험 정신 등이 한데 어우러질 경우 이재용 체재 아래서 삼성은 또 한번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1968년생인 이재용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MBA를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1년 삼성전자 총무그룹에 입사한 이 부회장은 2010년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에 올랐고 2년 뒤인 2012년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올라섰다. 화려한 스펙을 바탕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왔지만 재벌에 대한 일반의 편견을 뛰어넘는 인품을 갖췄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회사 문화가 기존의 권위적인 색깔에서 벗어나 소통을 중시하고, 위계에 의한 일방적인 지시보다는 수평적인 자율 토론을 장려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일찌감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힌 이 부회장은 글로벌 인맥 형성에 큰 공을 들이는 오너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 부회장은 2002년부터 매년 7월 미국 아이다호 주 선밸리에서 열리는 ‘앨런 앤드 코 미디어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등이 단골손님이며 이 부회장은 이 행사를 통해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마윈 알리바바 회장 등과 친밀도를 높였다. 이 부회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가장 자주 만나는 인사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해서도 재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이 부회장이 화려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선대(先代)와 달리 과감하고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 삼성은 과거 M&A에 소극적인 기업으로 분류됐다.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서 적극 수혈받기보다는 내부 역량을 직접 키워 경쟁에 대처하는 전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2016년에는 미국 전장 기업 하만을 80억달러에 인수하면서 미래 성장동력을 탄탄히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을 한화에 매각한 빅딜 역시 이 부회장의 지휘 아래 전격적으로 결정된 초대형 거래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경쟁력 있는 회사들은 발 빠르게 인수하고 정리가 필요한 부분은 과감한 ‘가지치기’를 해야 애플과 구글 등 라이벌 회사 간 생존 싸움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게 이 부회장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미중 갈등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실적으로 내는 것도 이 부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올 3·4분기 시장 기대를 뛰어넘는 실적을 발표하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연결기준 매출 66조원, 영업이익 12조3,000억원의 3·4분기 잠정 실적을 지난 8일 발표했다. 전기 대비 매출 24.6%, 영업이익 50.92%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로는 매출 6.45%, 영업이익 58.1% 증가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제2 창업’으로 글로벌 도약 이끈 위기의 승부사 [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0:06:59‘창업 보다 수성이라고 한다.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간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자서전 ’호암 자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호암은 한평생을 바쳐 이룩한 삼성을 누구에게 계승시켜야 할지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능력과 자질을 지닌 셋째 아들 고(故)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1987년 호암 타계 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창업 보다 어렵다는 수성에 성공한 것을 넘어 ’제2의 창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장 취임 당시 매출 9조9,000억원이던 삼성그룹은 2014년 400조원으로 40배나 늘었다. 특히 글로벌 무대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삼성전자(005930)가 휴대폰과 디지털TV,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창조적 파괴‘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 이 회장의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거대한 전환‘을 이끈 계기는 1993년 6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으로 제2 창업 주도=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사내방송팀(SBC)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본 이 회장은 격노했다. 테이프에는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 내는 장면 등 불량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당장 서울로 전화를 걸어 사장들과 임원들을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켰다. 그는 중역들에게 ”1979년부터 불량은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부회장, 후계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며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 아직도 양을 외치고 있다“며 질타했다. 그리고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은 물론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었다. 1990년대 초 삼성전자는 국내에서조차 명실상부한 1등이 아니었고 해외에서도 삼성 제품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특히 미국 양판점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본 이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종업원을 몇 만 명씩 거느리면서 자동화 시설 등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서도 400억~500억원 밖에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면서 임직원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이 회장은 ’양 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신경영으로의 전환을 위해 솔선수범했다. 수백명의 중역들을 미국, 일본, 유럽 등지로 데리고 다니며 삼성의 현주소를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변화에 대한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전격 도입했다. 오후 4~5시에 일과를 끝내고 남는 시간에 운동이나 어학공부 등 자기계발을 하도록 유도했다. 종업원 삶의 질을 높여야 제품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또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하는가 하면 1995년에는 500억원어치에 해당하는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우는 ’휴대폰 화형식‘을 지시하기도 했다. 모두 질 경영을 위한 이 회장의 충격 요법이었다. ◇디자인.창조경영 등 시대 앞선 통찰력=이 회장의 신경영은 ’디자인 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왜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고 파나소닉은 멀리서 봐도 파나소닉인데 삼성 제품은 아직도 이름을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가“라고 일갈하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1996년’디자인경영의 해‘를 선포했다. 이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이며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한다“며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95년 그룹 내 디자인 학교인 ’SADI‘를 설립한 데 이어 2005년 4월 주요 계열사 사장들을 이탈리아 밀라노로 불러모아 디자인 전략회의를 여는 등 초일류 기업을 향한 디자인 경영을 독려했다. 다른 기업들이 2000년대 중후반이 돼서야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디자인 분야에 투자를 강화한 것에 비춰볼 때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경영과 디자인경영은 이후 ’창조 경영‘과 ’마하 경영‘로 이어졌다. 창조경영과 마하경영은 이 회장이 2006년 사장단 회의에서 처음 던진 화두다. 제트기가 음속(1마하=초속 340m)을 돌파하려면 설계도는 물론 엔진·소재·부품을 모두 바꿔야 하는 것처럼, 삼성도 선진 기업을 추월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 계열사들이 개념 정립을 마치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확산에 나선 상태에서 이 회장이 타계하면서 마하경영은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전 임직원들이 반드시 안착화시켜야 할 유훈이 됐다. ◇’거안사위‘ 위기의식은 필생의 화두=2002년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일본의 소니를 추월한 기념비적인 해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삼성이 소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자 이 회장은 “누가 이런 얘기를 언론에 떠들고 다니는가. 우리가 소니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역정을 냈다. 이 회장은 같은 해 6월 용인의 인력개발원으로 사장단을 소집했다. 이날 회의의 백미는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난다“는 이 회장의 발언이었다. 이 회장에게 위기의식은 평생의 화두였다. 그 위기의식이 지금의 삼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의 신경영 선언도 삼성이 그저 그런 회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려도 이 회장은 자만에 빠지기 보다는 ’잘 나갈수록 위기를 생각하라‘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변화와 혁신의 선두에 섰다. 이 회장은 2003년 7월 직접 사장단을 이끌고 노키아를 방문하고 온 뒤 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세계 1등이 되려면 근육을 바꾸고 걸음걸이, 자세도 바꿔야 한다“며 ”뼛속까지 변화하라“고 주문했다. 또 2005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로 전자 사장단을 불러 디자인 전략회의를 가진 데 이어 같은 해 7월 한남동 자택에서 윤종용 부회장 등 경영진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삼성 TV는 왜 1등을 못하는 겁니까“라고 물으며 ’TV 1등‘을 달성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앞서 이 회장은 2003년 전체 판매량의 27%를 차지하던 브라운관 TV 생산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매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PDP·LCD 등 디지털TV로 승부를 걸라는 주문이었다. 삼성전자는 ’TV일류화프로젝트팀‘을 구성하고 반도체 부문의 시스템LSI 인력 200여명을 TV사업부로 일원화하는 등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등 TV 1등을 위한 행보에 나섰다. 이 회장의 혜안과 승부수가 먹혀 들어 삼성전자는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보르도TV‘가 출시된 2006년 세계 TV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1969년 흑백 TV를 생산한 지 37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TV 부문에서 삼성이 ’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변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경영복귀 후 출근경영으로 휴대폰 1위 이끌어=글로벌 휴대폰 시장은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요동쳤다. 피처폰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의 점유율이 급락했고 삼성의 점유율도 곤두박질쳤다. 여기에 이 회장이 삼성 특검 여파로 2008년 4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터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이 회장이 다시 나섰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의 일성은 비장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 회장의 지시로 무선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한 삼성전자는 주력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구글 안드로이드로 전환하고 2010년 5월 첫 스마트폰인 ’갤럭시 S‘를 재빠르게 내놓았다. 갤럭시S는 7개월 만에 전세계에서 1,000만대가 팔려 삼성전자의 첫 ’텐밀리언셀러 스마트폰‘이 됐다. 갤럭시 시리즈로 삼성전자가 무섭게 추격해오자 놀란 애플이 무차별적인 특허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이 회장은 2011년 4월 출근 경영을 시작하며 변화와 혁신을 독려했고 삼성전자는 2012년 총 4억대의 휴대폰을 팔아 점유율 25.2%로 세계 정상에 등극했다. 휴대폰 세계 1위를 달성했지만 삼성전자는 어떤 축하 파티도 열지 않았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하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마이크로소프트와 레노버에 매각되는 신세가 된 것도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방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신경영 20주년을 맞은 2013년 4월 해외 경영구상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 회장은 여전히 위기감과 도전의식을 강조했다.“이제 20년이 되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이건희 별세]한국 재계 큰 별 스러지다
산업 기업 2020.10.25 10:03:23한국경제의 거목(巨木)이 스러졌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자’는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사진)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당시 자택에서 이 회장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위기상황을 넘긴 뒤 10개월간 장기 입원치료를 받으며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 회장은 폐 부분의 림프암이 발병해 1999년 말∼2000년 초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은 뒤 재발 방지를 위해 매년 겨울이면 기후가 따뜻한 해외에서 지내며 각별하게 건강관리를 해왔다. 지난 2013년에도 1월 초 신년행사 후 출국해 3개월 가량 해외에 머물면서 요양과 경영구상을 하다 4월 귀국해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인사를 단행하는 등 그룹의 체질과 구조를 개선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다 갑자기 쓰러졌다. 이 회장이 입원하면서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 사업 구조조정과 새 먹거리 발굴을 진두지휘하면서 삼성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삼성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 회장이 타계하면서 그룹은 물론 한국 재계가 큰 슬픔에 잠겼다. 지난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일본 게이오대를 졸업하고 1968년 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77년 선친인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이 회장은 1979년 삼성물산 부회장에 선임돼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았다. 1987년 11월 선친이 타계하면서 그룹 회장에 오른 이 회장은 5년 뒤인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으로 임직원들에게 강도 높은 변화와 혁신을 주문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삼성은 ‘7.4’제 도입과 라인스톱제 등 ‘질(質) 경영’을 추진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회장은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기술·인재 경영을 펼쳐 삼성전자가 미국 애플과 일본 소니 등을 제치고 세계 1위 종합전자 회사로 도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1982년부터 15년 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비인기 종목인 레슬링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으며 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피선돼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별세
산업 산업일반 2020.10.25 09:53:47 -
[알립니다]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 이달 29일 개막
서경골프 골프일반 2020.10.15 18:15:42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2020시즌 타이틀 경쟁의 분수령이 될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이 오는 29일부터 나흘간 제주 SK핀크스 골프클럽에서 열립니다. 지난 2007년부터 골프팬들과 함께해온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은 매년 명승부를 통해 신지애·김하늘·이정민·허윤경·이승현·박결·최혜진 등 한국 여자골프의 현재와 미래를 대표하는 우승자들을 배출했습니다. 13회째를 맞은 올해는 메이저급 대회에 걸맞게 더욱 화려해진 출전선수 명단과 아름다운 코스로 골프팬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상금왕을 놓고 양보 없는 경쟁을 벌이는 스무 살 동갑내기 박현경·임희정과 지난 시즌 전관왕 위업에 빛나는 디펜딩 챔피언 최혜진, 신인왕 레이스에서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는 ‘슈퍼루키’ 유해란 등 국내파 강자들은 물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4인방인 김효주·이정은·유소연·최나연까지 총출동해 세계 100대 골프코스에서 ‘명품 샷 대결’을 펼칩니다. 방역을 위해 무관중으로 치러지는 올해 대회는 나흘간의 생중계를 통해 안방에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시즌 막바지를 맞은 선수들이 절정의 경기력을 선보일 이번 만추의 골프축제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대회기간 10월29일(목)~11월1일(일) 장소 SK핀크스 골프클럽 총상금 8억원(우승상금 1억6,000만원) 주최:서울경제 서울경제TV SEN SK핀크스 주관: KLPGA 방송: SBS Golf(1·2라운드 오전11시~오후5시, 3라운드 낮12시~오후5시, 4라운드 오전11시~오후4시 생중계) -
'이건희 80억원대 탈세 관여' 전직 삼성 임원 2심도 집유
산업 기업 2020.08.07 13:56:4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탈세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삼성그룹 임원이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8부(정종관·이승철·이병희 부장판사)는 7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 혐의로 기소된 전모씨에게 1심과 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원심에서 선고한 형량이 적정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당심(항소심)에 이르러 형량을 변경할 만한 조건 변경이 없다”며 검찰과 피고인 양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전씨가 지방소득세를 포탈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1심과 마찬가지로 공소를 기각했다. 고발이 있어야 공소가 제기될 수 있는 혐의인데도 고발 없이 기소됐다는 게 이유였다. 이 회장의 재산관리팀 총괄 임원이었던 전씨는 삼성 임원들 명의로 이 회장의 차명계좌를 다수 만들어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을 사고판 뒤 2007년과 2010년도 양도소득세와 지방소득세 총 85억5천,700만원을 내지 않은 데 관여한 혐의를 받는다. 삼성은 이들의 차명계좌를 2011년 국세청에 신고해 세금 1,300억여원을 납부했고, 2014년 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삼성 총수 일가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비를 삼성물산 법인 자금 33억원으로 납부한 혐의로 함께 기소된 삼성 임직원 3명도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1∼2년에 집행유예 2∼3년을 선고받았다./이희조기자 love@@sedaily.com -
상반기 총수 주식가치, 서정진 3조 늘고 이건희 1.7조 줄어
증권 국내증시 2020.07.09 17:42:37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의 주식 보유액이 상반기에만 3조원 넘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이건희 삼성 회장의 주식 재산은 1조7,000억원 줄어들었다. 9일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소장 오일선)는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그룹) 중 총수가 있는 50대 그룹 총수·회장의 상반기 주식평가액 변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집계됐다고 밝혔다. 조사 대상에는 공식 총수에서 물러난 이건희 삼성 회장과 공식 총수는 아니지만 실질적 총수 역할을 하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등 2명도 포함했다. 대상 52명 중 39명이 상장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올해 1월2일 주식 평가액은 57조6,150억원이었다. 지난달 30일 평가액은 56조5,123억원으로 반년 만에 1조1,026억원(1.9%) 감소했다. 39명 중 13명은 주식 재산이 증가한 반면, 26명은 줄었다. 주식 재산이 가장 많이 늘어난 총수는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었다. 이 기간 서 회장의 주식 재산은 2조7,015억원에서 5조8,458억원으로 3조1,442억원(116.4%)이나 증가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도 주식 재산이 1,542억원에서 3,094억원으로 100.6% 증가했다. 이외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1조9,067억원에서 3조3,446억원으로 75.4%, 김익래 다우키움 회장은 1,208억원에서 2,058억원으로 70.3%, 박정원 두산 회장은 1,670억원에서 2,561억원으로 53.3% 증가했다. 이들과 달리 상반기에 주식 재산이 30% 이상 날아간 총수는 10명이다. 정몽원 한라 회장의 주식 재산은 1,360억원에서 867억원으로 36.3%, 이우현 OCI 부회장은 755억원에서 481억원으로 36.2%, 김남구 한국투자금융 회장은 7,991억원에서 5,132억원으로 35.8% 감소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 34.2%(4,876억원→3,208억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33.1%(4조9,975억원→3조3,425억원) 등도 주식 재산이 30% 이상 줄어든 총수다. 상반기 말 기준 주식 재산 1위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다만 연초 17조3,800억원에서 6월 말 15조6,485억원으로 10% 이상 감소했다. 2위인 이재용 부회장의 주식 재산은 7조2,760억원에서 7조2,581억원으로 감소폭이 0.2%에 그쳐 별 변동이 없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삼성생명 주식 가치가 크게 떨어진 반면, 이재용 부회장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가치가 올랐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그룹 총수 중 주식재산 순위 6위에서 6월 말 3위로 뛰었고, 최태원 SK 회장은 재산이 3조3,482억원에서 3조7,767억원으로 12.8% 오르며 5위에서 4위로 올랐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8위였다가 5위권에 진입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
심의위 사흘전 생일 맞는 이재용…병상에 있는 이건희 찾을듯
산업 기업 2020.06.21 17:35:57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3일 만 52세 생일을 무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번 생일을 사법 리스크에 대비하고 경영 현안을 챙기는 업무 등으로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생일 사흘 뒤인 오는 26일 이 부회장의 기소 여부를 논의하는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려 편안히 생일을 즐길 여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은 23일 생일에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등 가족과 조촐한 식사를 하거나 삼성서울병원에서 와병 중인 부친 이건희 회장을 병문안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이 회장이 병상에 누운 뒤 매해 경영 또는 사법 리스크로 바쁜 생일을 보냈다. 특히 2017년에는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옥중 생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최근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올해 ‘최악의 생일’은 피했지만 수사심의위 결과를 앞두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경영·사법 리스크가 불거지기 전이던 2013년 이 부회장은 중국·미국을 순방하는 해외출장 도중에 생일을 맞았다. 당시 일본 출장길에 오른 이 회장과 나란히 출국해 ‘주요2개국(G2) 출장’ 일정을 소화하며 차세대 삼성 총수로서 입지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회장 와병 이후 삼성과 관련된 이슈가 생기면 직접 상관이 없어도 이 부회장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행태가 반복되면서 생일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태다. 2014년에는 이 회장 와병에 따른 총수 공백을 최소화하며 시간을 보냈고 2015년에는 생일 당일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를 했다.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모친인 홍 전 관장도 이 부회장이 몇 년째 검찰 수사와 재판에 시달리며 두문불출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홍 전 관장은 남편인 이 회장이 갑자기 쓰러진 뒤 7년째 입원 중인 상황에서 아들인 이 부회장이 계속 고초를 겪는 것에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홍 전 관장은 이 부회장이 구속수감 중이던 2017년 7월 부산의 한 사찰을 찾아 불교의식을 지내기도 했다. /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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