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별세]보통 사람들 가장 선호하는 수능 시험 만들었다
사회 사회일반 2021.10.26 16:13:48‘보통 사람’을 내세웠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교육계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도입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작년 시험으로 26주년을 맞은 수능은 오지선다식 평가로 암기식 교육을 조장해 학생들이 미래역량을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입 공정성 확보, 통합적인 사고능력 측정 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상 첫 수능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1993년 8월 20일 처음으로 치러졌다. 당시 수능은 8월과 11월 1년에 두 번 진행됐는데 언어, 수리탐구, 외국어(영어) 세 과목뿐이었고 만점도 200점이었다. 직전 정권인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0년 정부가 발표한 ‘7.30 교육개혁조치’로 대입 학력고사가 도입돼 치러져 왔지만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고 암기식 학습을 양산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노 전 대통령은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중심으로 교육당국이 새로운 대입 시험을 연구토록 했다. 이후 박 전 원장은 여러 차례 실험 평가를 거쳐 첫 수능을 성공적으로 실시했고 이후 ‘수능의 아버지’로 불렸다. 지금은 수능이 주입식 교육의 원흉으로 비판받지만 당시에는 암기식 평가를 벗어나기 위해 고등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새로운 시험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후 수능은 다음 해에 연 1회로 축소되는 등 거의 매년 변경돼왔다. 특히 세월이 흐를수록 사고력 평가라는 도입 초기의 취지는 사라지고 문제풀이식 시험으로 공교육 황폐화와 사교육 시장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기에는 입맛에 따라 정시와 수시 비중을 조절하는 등 대입 제도를 바꾼 역대 정부의 잘못도 있다. 대표적으로 현 문재인 정부도 공약으로 수능 절대평가를 추진하려 했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수시 제도의 불공정성이 드러나면서 정시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결과적으로 수능은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입 제도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경운기자 cloud@@sedaily.com -
[노태우 별세]북방외교의 그림자…돌려받지 못한 소련의 빚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0.26 16:12:27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국민의 쌈짓돈을 소련에 빌려주고 30년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림자도 낳았다. 또 한편으로는 공산권 국가와의 급진적인 관계개선으로 반공주의의 뿌리가 더 깊게 박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를 앞세워 냉전 체제의 끝에서 요동친 동아시아 정세의 해법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소련과의 수교를 통해 북한을 대외적으로 압박하고자 했다. 한국을 중심으로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목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먼 곳과 사귀고 가까운 곳을 때린다)’으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전략이다. 북방외교를 첫 단계로 해서 북한의 대외개방을 이끌고 이후 한국의 생활·문화권을 북방으로 확장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동구(유럽의 동쪽)권 공산국가들과 외교를 통해 평화통일을 길로 가고자 한 것이다. 과감한 구상엔 ‘돈’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를 맞이한 소련은 1980년대 들어 혹독한 군비경쟁에 노출됐다. 재정은 파탄지경까지 갔고 만성적인 외화부족 상태에 돌입했다. 1985년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을 택했지만 외화를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노태우정부는 이 사정을 간파하고 있었다. 1990년 한-소 수교는 경제협력을 위해 소련에 차관 3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이 붙었다. 당시 우리나라(1989년 기준)의 무역수지가 9억 1,200만 달러, 외환보유고가 149억 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노태우정부는 북방외교를 위해 국가의 3년 치 무역이익을, 외환보유고의 20%를 소련에 빌려주는 파격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1999년 돌려받는 조건으로 1991년까지 14억 7,000만 달러(10억 달러·소비재 4억 7,000만 달러)를 소련에 빌려줬다. 하지만 노태우정부는 아쉽게도 냉전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소련의 상황을 간파하지 못했다. 소련의 붕괴다. 1991년 12월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우리 외환보유고의 10%를 빌려간 뒤 1년 만에 소련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 빚은 후임인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가 떠안았다. 문민정부는 러시아와 빚을 방산물자와 원자재 등으로 상환하는 ‘불곰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1997년 말 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의 여파는 1998년 러시아까지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자와 원금은 30억 달러로 불어났고 결국 우리 정부는 2003년 6억 6,000만 달러를 탕감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아직도 돈을 받기 위해 협의를 하고 있다. 북방외교의 명암은 뚜렷하다. 섣부른 외교적 판단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지도 못한 채 국민의 돈을 떼였다는 비판이다. 반면 차관으로 흘러간 우리의 소비재가 러시아 시장에서 자리 잡고 불곰사업으로 양국이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해온 점은 긍정적인 면으로 꼽힌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속도를 낸 북방외교가 한국에서 반공주의를 자극했다는 평가도 있다. 노태우정부는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전 의원이 잇따라 방북하는 사건이 터지는 와중에도 북방외교를 밀어붙였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더욱 확산되는 원인을 제공하기 되기도 했다. 다만 국시(國是)로 이어온 반공주의를 극복하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적대적 국가들과도 수교한 노태우정부의 강단이 한국 외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
[노태우 별세]3당 합당, 거대보수정당 낳고 YS·DJ·盧 대통령 잉태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0.26 16:08:52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거대 정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은 한국 거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뿌리가 됐고 정치적 야합의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3명의 대통령을 낳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 1987년 전두환을 몰아낼 정도로 거셌던 민주화 태풍은 군인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피해갔다. 태풍의 경로를 튼 건 민주화 이후 분출한 ‘지역주의’였다. 민주화 이후 야당의 거물이었던 양김(김영삼·김대중)은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며 분열했다.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꿈꿨다. 노태우는 대구경북(TK)에서, 김영삼은 부산경남(PK)에서 김종필은 충청에서 유리하지만 본인은 호남과 수도권에서 강점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공식은 대통령 선거에서 ‘4자 필패론’이 됐고 분열의 틈을 타고 노태우는 36%라는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여론의 반작용은 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35석) 등 야 3당이 164석을 차지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125석)을 누르는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다. 야권이 커지자 그간 억눌려있던 5·18 민주화운동과 언론통폐합, 군사정권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한 목소리가 분출했고 민정당은 흔들렸다. 노태우는 이때 ‘3당 합당’을 꺼내며 정치지형을 송두리째 바꿨다. 김종필과 내각제 개헌의 입을 맞춘 노태우는 제2 야당을 이끄는 김영삼에 합당을 제안했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3당 합당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합친 3당은 217석, 헌정사상 가장 거대한 보수여당 ‘민주자유당’으로 탄생했다. 보수정당에 군사정권의 후예인 민정계, 민주화 출신의 민주계, 내각제의 공화계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정치사의 획을 그은 3당 합당은 많은 거물을 낳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았다. 민주계를 이끌고 민자당의 총재가 됐고 14대 대선에 나가 대통령이 됐다. 거물들은 승리공식이 분열이 아닌 야합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대선에서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김대중은 15대 총선에서도 참패한다. 김대중은 약속한 내각제 개헌을 헌신짝처럼 버린 김영삼에 앙금이 있던 김종필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탄생한 ‘DJP연합’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16대)도 3당 합당이 낳았다. 1990년 1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마포 당사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3당 합당을 발표하자 당시 의원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이의있습니다, 반대 토론 해야합니다”라고 외쳤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계로 정치권에 몸담았다. 하지만 김영삼 총재가 “고뇌했다”며 밝힌 3당 합당을 그 자리에서 반대한다고 외쳤다. 묵살되자 “(반대 토론이 없는) 이것이 어찌 회의인가”라며 삿대질을 하며 반발했다. 노무현은 김영삼을 등지고 탈당했다. 이후 평민당에 합류해 김대중을 이어 민주계 대통령이 됐다. 3당 합당은 한국 사회에 ‘대결적 지역주의’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도 남겼다. 13대 대선의 4자 필승론에서 ‘TK-PK-호남-충청’으로 나눴던 지역 구도는 3당 합당 이후 호남 대 비호남으로 굳어졌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15대와 16대 대선을 지나며 호남대 비호남은 ‘호남 대 영남’으로 변했고 두 지역은 서로 반목하는 정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
12·12 쿠데타 주역, 6·29 선언으로 대권…영욕의 정치역정 [노태우 별세]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0.26 16:04:52군사 쿠데타의 주인공, 부드러우면서도 결단력을 갖췄던 지도자. 역사 속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13대 대통령이다. ‘보통 사람’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그의 슬로건이었지만 보통 사람처럼 생긴 외모와 달리 그의 삶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8월 17일에 대구(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부친 노병수와 모친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서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결혼 후 9년 만에 노 전 대통령을 낳았다고 한다. 신식 교육을 받아 ‘개명신사’로 통했던 부친은 4~5세부터 그를 무릎에 앉히고 마을 유일의 유성기를 종종 들었다. 노래를 잘 부르기로 유명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에도 유성기를 틀어주던 부친의 모습을 회고하고는 했다. 평이했던 그의 삶을 바꾼 건 육군사관학교 입학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모임인 ‘하나회’를 통해 군인에서 정치인이 되기 시작한다. 군인에서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60년의 애증 관계였던 전두환도 육사에 만난다. 그의 육사 동기이며 같은 대구 출신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56년 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5사단장이던 박정희라는 인물을 알게 된다. 5사단 소대장 시절 사단장이었던 박정희는 노 전 대통령을 각별히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어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한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신군부 세력의 정권 획득을 위한 계획과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2인자의 반열까지 오른다. 이후 1980년 8월 6일에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8월 23일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체제에서 2인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친구였던 전두환이 그를 하대하고 눈에 띄게 경계하며 둘 사이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2인자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숨 죽인 채 전두환 정권 체제를 버텨냈다. 그는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민주정의당에 입당, 정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에 의해 민정당 당무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민정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이어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장관에 발탁됐고 그해 4월 28일 제41대 내무부 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85년에는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민정당 최고위원으로 내정돼 당권 전부를 위임받았다. 1987년부터는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됐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며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그늘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어 중국·동구권·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정책을 추진했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 단체의 요구를 수용해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켰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기도 했다. 범죄와의 전쟁, 작전통제권 환수 추진과 비핵화 선언, 언론 자유화 등이 그의 재임 시절 성과들이다. 재임 기간 서울에서 열린 88 올림픽은 냉전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다만 그의 말로는 편치 않았다. 1993년 퇴임 이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에 연루됐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도 됐다.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2002년부터 투병 생활을 시작해 2021년 10월 26일 생을 마감했다. -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서민 내집마련 꿈 실현"…분당·일산 등 200만호 공급
정치 대통령실 2021.10.26 16:00:10“주택을 짓는 ‘집 대통령’으로 남고 싶습니다.” 지난 1987년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표방하며 대선에서 당선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평소 참모진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시절 내세웠던 공약 ‘주택 200만 가구 공급’에는 이런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 담겼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1989년 2월 취임 1주년을 맞아 연 행사에서 서민 대상 영구임대주택 25만 가구를 포함해 임기 내 수도권에 90만 가구, 지방도시에 110만 가구 등 총 200만 가구를 짓겠다는 정책을 공식 발표한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행사 연설에서 “보통사람들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당장 실현시킬 수 있는 주택정책을 올해부터 밀고 나가겠다”며 강한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투기 세력 ‘정밀 타격’…역사적인 200만 가구 주택 공급=노 전 대통령이 주택 문제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당시 토지와 주택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동안 강력한 안정화 정책의 영향으로 연평균 10.5%로 비교적 안정적이던 지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권 출범 첫해인 1988년 27.5%, 1989년 32%까지 상승했다. 주택 가격 역시 1988년 13.2%, 1989년 14.6%, 1990년 21%로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다. 주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2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최근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국민의 물가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토지 투기 현상과 상류층의 아파트 투기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게 됐다. 5년 만에 당시 전국 주택 수(640만 가구)의 3분의 1가량을 추가하겠다는 것은 무리를 넘어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집 대통령’을 꿈꾼 노 전 대통령은 이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200만 가구 건설 사업의 하이라이트는 신도시 건설 사업이었다. 집을 지으려고 보니 서울 시내는 이미 포화 상태고 그린벨트는 손을 댈 수 없으니 서울 중심에서 20㎞가량 떨어진 그린벨트 너머에 신도시를 건설하자는 대안을 찾은 것이다. 이른바 1기 신도시인 분당과 일산·중동·평촌·산본이 탄생한 배경이다. ◇‘집값 폭등’…토지공개념 3법 등 무리수도=부동산 가격 폭등은 정권의 존립과도 직결됐기에 전력투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순 경제부총리와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관료들은 연일 “개혁이 없으면 민란이 일어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8·19부동산 대책을 통해 부동산 종합 대책을 발표하면서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도 신설했다. 연구위원회는 1989년 4월 ‘토지공개념 확대도입을 위한 국민토론회’를 열고 ‘1기 신도시(분당·일산)’와 함께 ‘토지공개념 3법’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서울 등 6대 도시 소유 택지 면적을 660㎡(200평)로 제한한 ‘택지소유상한법’과 △개발이익을 세금으로 환수하는 ‘개발이익환수법’ 및 ‘토지초과이득세법’ 등이다. ‘지가’가 지나치게 상승해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개발이익이 소유주 개인의 사익으로 기형적으로 변질되면서 서민 경제가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 것이다. ‘서민부터 살리고 보자’는 정책 일관성과 투기 세력을 정밀 타격한다는 방향성으로 추진했다. ◇빠른 신도시 건설…속도전 부작용도=노태우 정권은 신도시 건설을 빠르게 진행했다. 1989년 4월 신도시 건설 계획을 발표한 지 7개월 만인 같은 해 11월 분당 시범단지(4,030가구)가 분양됐다. 이어 2년 만인 1991년 9월 분당의 첫 입주가 시작됐고 1992년부터 평촌(3월), 산본(4월), 일산(8월), 중동(12월) 등이 잇따라 뒤를 이었다. 신도시뿐 아니라 200만 가구 정책 역시 가속도가 붙을 대로 붙어 1991년 8월 214만 가구를 지어 목표치를 추가 달성하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건설 광풍’은 일단락됐다.이 같은 주택 ‘물량 공세 속도전’은 역시 큰 부작용을 낳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공사가 이뤄지다 보니 건설자재 품귀 현상이 빚어졌고 각 공사장에서 충분한 품질 검사 없이 아무 자재나 끌어쓰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91년 이른바 불량 레미콘, 바닷모래, 불량 철근 파문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탓에 일부 신도시에서는 이미 완공된 아파트를 헐고 다시 짓는 어이없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기 신도시들은 당초 목표와 달리 자족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었다. 이들 신도시가 이른바 ‘베드타운’화한 것이다. 신도시가 신규 고용 창출이 크지 않은 채 주택 공급지로서의 역할에 머무르게 됐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고용 분산을 수반하지 않은 대량 주택 공급은 결국 서울 출퇴근을 위해 신도시 주민이 몰려드는 교통난의 원인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조순·박승·김종인…걸출한 경제 거목 발굴
정치 정치일반 2021.10.26 15:55:28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경제사에 걸출한 경제 거목(巨木)을 여럿 발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다. 조 교수는 육사 영어 교관 시절 당시 생도였던 노 전 대통령을 만난 인연으로 지난 1988년 12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노 전 대통령이 스승인 조 교수를 삼고초려해 부총리로 영입한 것이다. 당시 부총리로서 노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문희갑 경제수석과 함께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도하기도 했다. 조 명예교수는 노태우 정권 말기에 한국은행 총재까지 지냈고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민주당 소속 서울시장과 한나라당 총재를 지냈다. 또 다른 인물은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다. 박 교수는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학자였지만 노 전 대통령만큼은 국민이 직접 뽑은 최초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 초대 경제수석이었던 박 교수는 자리를 옮겨 건설교통부 장관도 지냈다. 건교부 장관 때는 1기 신도시 조성지로 경기도 일산을 노 전 대통령에게 건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도 노태우 정권 때 입각했다.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이미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 전 위원장은 1989년 7월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발탁돼 일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 말까지 2년여간 경제수석을 지내면서 경제 분야에서 막강 실세 역할을 했다. 당시 도입이 추진됐던 금융실명제 전면 보류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 전 위원장을 비롯한 몇몇을 직접 언급하며 그들을 자신에게 조언을 해준 이들로 소개 했을 정도로 각별하다. -
노태우 전 대통령 앓던 '소뇌위축증' 어떤 병…"소통 안되면 울상"
정치 정치일반 2021.10.26 15:53:41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26일 별세했다.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1979년 10월 26일)이기도 하다. 소뇌위축증과 천식 등 지병으로 오랜 병상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최근 병세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이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요양해왔다. 지병으로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과 천식까지 더해져 투병 생활을 하면서 공개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지난 4월에는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후송되기도 했는데, 당시 노 전 대통령 장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또 한고비를 넘겼다"고 전하기도 했다. 노 관장은 ‘아버지의 인내심’이란 글에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어떻게 십 여년을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달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노 관장은 “때로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는데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며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어 노 관장은 "어머니는 영혼과 몸이 그야말로 나달나달해지도록 아버지를 섬기셨다. 어느 소설에서도 이토록 서로를 사랑한 부부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이 수년간 투병하던 ‘소뇌위축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소뇌위축증’은 균형을 담당하는 소뇌에 문제가 생겨 운동 기능 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이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거나 똑바로 걸을 수 없는 게 특징이며 손발 운동장애, 안구 운동장애, 언어장애, 어지럼증세를 보인다. 심하면 보행 및 운동력 상실과 근육이 마비되며, 안구의 운동도 저하돼 나중에 실명에까지 이르고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 한편 군사쿠테타의 주인공, 부드러우면서도 결단력을 갖췄던 지도자. 역사 속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13대 대통령이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 동구 신용동)에서 면 서기였던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정착과 외교적 지위 향상,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퇴임 후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 蘇·中과 국교 맺은 과감한 '북방 정책'…韓 외교 반경 넓혔다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0.26 15:50:45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치적은 외교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반공’을 정치 생명 연장의 도구로 활용해온 전임자들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북방 정책’이라는 개념을 한국 외교에 주도적으로 도입해 북한의 절대 우방이자 우리와는 적대 관계였던 소련·중공으로 눈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외교 정책은 지난 1988년 취임사에서부터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 국가에도 국제 협력의 통로를 넓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교류가 없던 저 대륙 국가’. 바로 소련과 중공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분단과 냉전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한 번 뛰어보겠다는 선언이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첫해 열린 88 서울하계올림픽·패럴림픽은 북방 외교의 도약대가 됐다. 소련·중공은 물론 동유럽·아프리카·중남미 등지의 공산권 국가들은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온갖 획책으로 공산권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발전상이 제대로 노출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산권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1989년 2월 헝가리, 같은 해 11월 폴란드와 공식 수교를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외교사의 초대형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대형 이벤트도 열렸다. 1990년 6월 미국 한복판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직접 대면한 것이다. 첫 만남이 어려웠을 뿐 한국과 소련의 수교를 위한 절차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해 9월 한국은 소련과의 국교를 공식 수립했다. 두 달 후에는 노 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이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듬해 4월 한국을 답방했다. 북한도 한 번 간 적이 없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부터 방문한 것이다. 한국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 의제는 묵직했다. 한국의 유엔 가입 문제에서부터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 협정 서명, 북한 개방 등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구체적인 의제들이 집중 논의됐다. 소련과의 급진적인 관계 개선은 한국에 대한 중공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결국 한국과 중공은 1992년 8월 국교를 수립했다. 특히 한중 수교는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1992년 63억 8,0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양국 교역 규모는 20년 만에 35배나 늘어난 2,206억 2,000만 달러 수준으로 폭증했다. 이처럼 북방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수교국은 30개국이 더 늘어 총 130개국이 됐다. 이 같은 탈(脫)냉전이라는 국제 정세의 급변 속에 대북 문제도 전향적으로 풀어갔다. 취임 초 남북한 교역 문호 개방 등 6개항으로 구성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7·7 선언으로 불리는 이 발표를 북한과의 직교역 및 이산가족 왕래, 외교적 상호 협조 등 남북 교류 협력의 물꼬를 튼 중대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듬해인 1989년 노 전 대통령은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특별 연설을 통해 남북 간 상호 대화를 통한 신뢰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안하는 등 남북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노 전 대통령이 1991년 11월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남북 관계에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1991년 소련과의 ‘전략무기 감축 협정(START)’ 타결의 연장선상에서 주한 미군에 배치된 전술핵을 철수하자 노 전 대통령은 핵무기의 부재까지 선언했다. 이러한 노력은 남한과 북한 정부 대표가 1991년 12월 남북 간 화해, 불가침, 교류 협력을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성과도 이끌어냈다. 특히 노태우 정부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이끌기 위해 남북 교역 및 북한 주민 접촉을 합법화하는 남북교류협력법 및 남북협력기금법등을 제정해 이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남북 교류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88 올림픽 유치…지구촌 '화합의 場'으로
정치 국회·정당·정책 2021.10.26 15:48:06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포츠 발전과 남북 스포츠 외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지난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노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거쳤고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이끌었다. 반드시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노태우 정무장관은 1981년 9월 4일 올림픽 유치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이규호 문교부 장관, 노신영 외무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등 관계자들에게 범국민적인 유치 활동을 지시했다. 정부의 올림픽 유치 대책반은 즉시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장에서 활동할 유치단 구성에 착수했다. IOC 총회를 불과 3주일 앞두고 체육계와 재계의 유력 인사 등 107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왕성한 유치 활동을 펼친 끝에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의 기적’을 이뤄냈다. 후발 주자였던 서울이 52표를 받아 27표에 그친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개최는 경제 성장과 국가 대회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꼭 필요했고 경쟁 상대국이 일본이라 국민들은 큰 기쁨을 누렸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1964년 도쿄)에 이어 두 번째, 개발도상국으로는 최초, 세계 16번째로 하계올림픽 개최 국가가 됐다. 1988년 9월 17일 개막한 서울 올림픽은 지구촌 스포츠 축제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분단국가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의 발전상을 전 세계에 강하게 심어줬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가 미국과 옛 소련의 대결 구도 속에 반쪽 올림픽에 그친 후 12년 만에 두 진영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화합의 장이었다. 당시 소련과 동독 등 미수교 국가 선수단의 참가는 이후 수교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16일 동안 300만 명이 넘는 관중이 각종 경기장을 찾았고 우리나라는 12개의 금메달로 종합 4위에 올라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또한 서울 올림픽 개최 경험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등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 유치와 성공 개최의 기반이 됐다. 남북 스포츠 교류의 상징인 ‘한반도기’도 노태우 정부 시절이던 1990년 탄생했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우리나라의 지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는 그동안 국제 종합 스포츠대회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을 할 때마다 앞장을 서왔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이 1989년과 1990년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남북의 국기를 대신할 단기 제정 문제가 논의됐는데 남북이 절충을 거듭한 끝에 한반도기가 단기로 정해졌다. 당시 남북 단일팀 구성은 무산됐지만 한반도기는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 남북한이 응원 도구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단일팀 구성을 포함한 남북의 스포츠 교류는 남북 관계 개선에 윤활유 구실을 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이 처음 단일팀을 이뤄 난공불락의 만리장성 중국을 물리치고 여자 단체전 우승을 이뤄냈다. 이 때가 한반도기가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남북 단일팀을 대표한 시기였다. 같은 해 6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남북 단일팀이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8강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해 12월 노태우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며 분단 이후 처음으로 적극적인 남북 화해 정책에 나섰다. /박민영 기자 mypark@@sedaily.com -
[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 YS·JP와 역사적 3당합당…'통합의 정치 유산' 만들어
정치 대통령실 2021.10.26 15:21:55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 ‘통합의 정치’가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통합의 정치를 구현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과 대통령 취임 이후 여소야대·여대야소 정국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얘기를 듣기 위해 힘을 쏟았다. 군부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큰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물론 진보 진영의 원외 정당인 민중당의 대표와도 영수 회담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도 그의 경청하려는 태도만큼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통합의 정치가 우리나라가 군사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갈등의 진폭을 좁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그의 통합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대립과 갈등이 더 오랜 기간 지속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후한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도와 5년 단임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차 개헌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통합의 정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해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불어닥친 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비롯한 평화적인 정부 이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 국민 대통합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했다. 군사 독재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따른 8개 항목의 시국 수습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 방안이 발표되기까지의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6월 항쟁 2개월 전인 4월 13일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발하는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던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정권은 강력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해산이 거듭됐고 일부 학교는 문을 닫았다. 코너에 몰린 전 전 대통령은 시국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6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영수 회담을 했다. 이 회담은 ‘영수 회담밖에 답이 없다’는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을 전 전 대통령이 받아들여 이뤄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후 직선제 요구 수용이 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뤄졌는지, 아니면 노 전 대통령을 위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주장이 엇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을 중시했다는 점만큼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야당의 요구였든, 전 전 대통령의 권유였든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의 통합의 정치는 1988년 2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이어졌다. 취임 2개월 뒤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국회 전체 의석(299석) 가운데 125석을 얻는 데 그쳤다.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은 각각 70석, 59석, 35석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 돌파구도 영수 회담에서 찾았다. 총선 이후 한 달이 지난 5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총재를 청와대에서 마주했다. 영수 회담 테이블에는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5·18 민주화 운동, 제5 공화국 비리 규명 등의 안건이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야당 총재를 국정 동반자로 인정하고 국가의 주요 현안에 대해 늘 상의했다. 야당 총재와 단둘이 만나는 2자 회담도 수시로 열었다. 1989년 3월에는 김대중 총재와도 만나 전 전 대통령과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 인책을 약속했다. 특히 이 회동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중간 평가’ 공약 철회에 합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김영삼 총재에게 ‘정책 연합’을 제안했다. 12월에는 노 전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가 함께 모여 지방자치제 부활을 놓고 논의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여소야대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거대 정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은 한국 거대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의 뿌리가 됐고 정치적 야합의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3명의 대통령을 낳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 김종필 총재와 내각제 개헌의 입을 맞춘 노 전 대통령은 제2 야당을 이끄는 김영삼 총재에게 합당을 제안했다. 김영삼 총재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3당 합당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합친 3당은 217석, 헌정사상 가장 거대한 보수 여당 ‘민주자유당’으로 탄생했다. 정치사의 획을 그은 3당 합당은 많은 거물을 낳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았다. 민주계를 이끌고 민자당의 총재가 됐고 14대 대선에 나가 대통령이 됐다. 거물들은 승리 공식이 분열이 아닌 야합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대선에서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김대중은 15대 총선에서도 참패한다. 김대중은 약속한 내각제 개헌을 헌신짝처럼 버린 김영삼에 앙금이 있던 김종필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탄생한 ‘DJP연합’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16대)도 결과적으로는 3당 합당이 낳았다.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