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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지만 정치권은 뾰족한 경제살리기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는 국내외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함몰된 채 '성장담론'을 외면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고 여야의 구분도 없다. 국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복지정책과 재벌 때리기에는 열을 올리고 있지만 경제 파이를 키우는 성장과 경기부양에는 애써 입을 다물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업투자가 필수적이지만 정치권은 경제민주화와 지배구조 개선을 앞세워 기업들에 되레 재갈을 물리고 있고 활동 반경도 옥죄고 있다.
법인세 감면을 통해 기업투자를 활성화해야 하지만 대선 후보들은 법인세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내수소비를 살릴 수 있는 정교하고 정치한 액션플랜을 마련해야 하지만 '경제민주화=성장'이라는 방정식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수출역군인 기업들의 손발을 옭아매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성장을 일궈낼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와 주장만 쏟아내고 있다.
새누리당에서는 김광두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산하 힘찬경제추진단 단장이 '10조원 경기부양'을 주장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행추위 집행부가 현 시점에서 경기부양을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제지를 했기 때문.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는 현 시점이야말로 경기부양과 성장을 논해야 하는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김 단장이 화두를 던졌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김 단장은 "경제민주화 자체가 경제를 살린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와는 별개로 (경기부양) 정책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과학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창조경제'를 대선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일자리 창출을 역설하고 있지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도 성장을 강조하고 있지만 경제위기 대응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정책의 방점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에 찍혀 있다. 문 후보는 지난달 11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형 뉴딜이 필요한 시기"라고 밝혔다. 그는 뉴딜의 핵심 내용으로 경제민주화를 통한 규제의 제도화, 복지 확대를 제시했다. 성장과 경기부양은 쏙 빠졌다.
문 후보는 '연간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 실현'을 필두로 0~5세 완전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 등 복지 확대를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우선 토목∙건축 예산을 복지로 돌리고 2차로 대기업과 부자에게 과다하게 주어지는 조세감면 혜택을 줄이기로 했다. '대기업 팔을 비트는 것이 성장'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순환출자 전면 금지, 10대 그룹 출자총액제한 부활, 지주사 요건 강화, 기업형 범죄의 국민참여재판 의무화, 유죄 판결을 받은 총수의 경영 배제 등 재벌개혁 방안도 내놓은 상태다.
안 후보의 성장론인 '혁신 경제'는 빈부격차 해소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아울러 경기부양책을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꼬집으며 일시적으로 쓰더라도 중산∙서민층 복지 확대에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안 후보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장하성 국민정책본부장은 "현재 노동에 있어서의 불균형, 기업 간 불균형 구조를 바꿔주면 잠재 성장률을 1.5~2%포인트 이상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내수와 수출기업 간 격차를 줄여나가는 산업구조 개선을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다분히 원론적인 청사진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액션플랜은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안 후보 선거캠프는 최근 중국 경제의 상승세를 거론하며 "내년 세계경제가 어려워지겠지만 한국은 상당히 좋은 여건에 있다"고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정치권의 성장담론 부재 현상에 대해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공정거래,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등은 경제민주화의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지나친 지배구조 규제는 우리 경제의 성장을 제약하게 된다"면서 "경제민주화와 성장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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