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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 광한루에서…하선(광해군 대역)의 순정이 되고 싶소이다

⑧ 남원 광한루원-'광해, 왕이 된 남자'





“두둥실 떠오른 저 달은 내 님의 얼굴/ 누가 내 님 모가지 싹둑 잘라 저기 걸어 두었나/ (중략) 달 뜨면 내 님인가 하여 하염없이 바라보노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2012년)’에서 하선(이병헌)은 어느 고요한 밤 오작교로 중전(한효주)을 불러내 이렇게 직접 지은 시를 읊어준다. 배우 이병헌이 1인 2역을 멋지게 소화한 ‘광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광해군의 15일 동안의 행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복원한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 하선은 저잣거리의 천한 만담꾼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왕이 된 남자’다. 사연은 이렇다. 역모의 흉흉한 소문이 궁 안팎에 떠돌던 광해군 8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한 왕(이병헌)은 도승지 허균(류승룡)에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왕 노릇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찾아놓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허균은 왕과 용모는 물론 말투까지 똑같은 하선을 데려온다. 만일을 대비한 포석이었던 하선은 얼마 안 가 왕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생각보다 빨리 ‘실전’에 투입된다. 극비리에 진행된 이 모의를 알 리 없는 중전은 하선의 낭만적인 애정 표현을 짐짓 이상히 여기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 살포시 웃어 보인다.

광해군 의식 잃자 왕 노릇하는 만담꾼

광한루 오작교서 중전 향해 애정 자작시

진짜보다 진짜같은 애틋한 순정 드러내



영화에서 하선이 중전에게 자작시를 바치는 오작교는 전북 남원의 광한루원 안에 위치해 있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유명한 광한루원은 세종 때인 1419년 남원으로 유배를 온 황희 정승이 누각을 지으면서 건립의 역사가 시작됐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조금만 걸으면 이내 연못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에 등장하는 이 다리는 ‘1년에 한 번만 밟아도 부부 사이가 좋아지고 자녀 역시 복을 듬뿍 받는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푸근해지는 전설 덕분인지 광한루원의 오작교는 1년 내내 함께 사진을 찍고 추억을 남기며 돈독한 정을 쌓는 가족과 연인들로 북적인다.

‘광해’에서 오작교를 거닐며 애틋한 순정을 드러낸 하선은 청춘 사업 이외의 영역에서도 의외의 실력을 발휘한다. 인형극을 하듯 처음에는 허균이 시키는 대로 입만 뻥긋하던 하선은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동이 틀 때까지 정책을 궁리하며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로 거듭난다.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위한 대동법을 즉시 시행하라고 명하는가 하면 백성의 고혈을 짜내 진행되던 궐 공사도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하선은 ‘사람을 보듬는 정치’로 정적을 제외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황희 정승 유배 와서 생긴 광한루원

누각·다리·연못 어우러진 조경에 탄성

‘춘향전’ 무대로도 유명, 볼거리 빼곡



오작교 바로 뒤편에 우뚝 솟은 누각은 황희가 처음 세우고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탄 후 인조 4년(1626)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광한루다. 원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1434년 중건을 맡은 전라 관찰사 정인지가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만큼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명칭을 광한루로 바꿨다. 품위와 격조가 돋보이는 누각과 다리, 푸른 수목이 한데 어우러져 연못 위에서 아른거리는 풍경을 감상하노라면 왜 이곳이 조선 시대 조경 미학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명승지라 불리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영상관과 체험시설을 갖추고 ‘춘향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와 유물을 품은 춘향관도 광한루원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영화에서 산자락의 절로 피신했던 ‘진짜 왕’이 의식을 되찾고 궁으로 복귀하면서 하선의 위험한 역할 놀이는 보름 만에 끝난다. 하지만 ‘가짜 왕’ 하선에 일찌감치 감화된 허균은 “살려두지 말라”는 광해군의 명을 거역하고 하선이 목숨을 부지하도록 돕는다. 어떤 면에서 ‘광해’의 이야기는 달콤하지만 실현되기는 힘든 백일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착한 서사가 지닌 정서적 힘은 막강하다. 하선이 명나라에 군사 원조를 해야 한다는 대신들에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다”고 외칠 때, 허균이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치는 하선을 향해 허리 굽혀 경의를 표할 때 우리의 심장은 숯불을 넣은 화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어쩌면 ‘광해’를 보려고 기꺼이 극장을 찾은 1,232만 관객의 마음에 깔린 것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염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안위보다 국민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그리하여 내 나라가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국가로 바로 서기를 바라는 그 소망 말이다. /글·사진(남원)=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광한루원’의 춘향관 인근에 마련된 민속 놀이터에서 방문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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