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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백년·만년 후를 상상하다...도발·실험으로 가득한 '융합콘텐츠 원조'

<1> 왜 지금 백남준인가

과학과 미술 결합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1980년대에 이미 4차혁명 예리하게 예견

전자 초고속도로·로봇·인공위성 활용 등

기술이 바꿀 미래 '예술적 언어'로 그려내

오늘날 BTS 못잖은 예술계 한류 이끌어

10월17일 英 테이트모던서 회고전 앞두고

지인·미술 원로들과 '인간 백남준' 재조명

“1931년 9월31일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최고의 쾌락을 음미하는 동안 잉태되었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한 1932년 7월20일에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하면 6월 17일(스탈린에 대항하는 봉기일)이다. 한국 전통에 따라 집에서는 음력 6월17일에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학교 서류와 여권에는 7월20일이 내 공식적인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날을 더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독일국민이 히틀러에 저항한 날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때문에 흘린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6월17일뿐만 아니라 7월20일도 국경일로 정해야 할 것이다.

1933년에 나는 한 살이었다.

1934년에 나는 두 살이었다.

1935년에 나는 세 살이었다.

(중략)

1945년에 나는 열세 살이었다.(1945년은 대한민국이 해방된 해다. 여전히 외국 열강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지만)

(중략)

1950년에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로, 외국의 ‘원조’는 매우 복잡했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거절할 권리도 없는데 과연 원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중략)

1963년에 나는 서른 한 살이었다.

1964년에 나는 서른두 살이다.

1965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될 것이다.

1966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서른네 살이 될 것이다.

(중략)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백남준이 10월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개의 모니터를 탑처럼 쌓아올려 지름 7.5m 높이 18.5m로 제작한 비디오설치작품 ‘다다익선’. 현재는 기계 노후화로 모니터 전원이 꺼진 상태라 미술관 측이 대처방안을 논의 중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토록 망측하게 시작해 터무니없는 전개를 보여주다 황당무계한 마무리로 자서전을 적은 사람.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백남준(1932~2006)이다. 정확하지 않은 자신의 잉태 시점을 달력에 존재하지 않는 날짜인 ‘9월 31일’로 적은 것이나, 1만 년 뒤 10만 살을 이야기하는 것 등에서 백남준 특유의 위트를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전통을 계승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유럽의 역사와 조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폭넓은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백남준은 지난 1964년에 동료이자 유럽의 전위예술그룹인 플럭서스의 주요 작가인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이처럼 정성스런 답글을 적어 보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서른두 살의 현재를 살면서 할아버지 대(代)까지 거슬러 생각하고 100년 후, 1만 년 후를 내다보는 범세계적이며 범우주적 상상력이다.

누군가 말했다. “한국은 잘 몰라도 삼성, 현대, 그리고 백남준은 세계가 안다”고. 유럽의 도시에 한국식당은 없을지언정 도시의 주요 미술관마다 백남준의 작품은 한두 점씩 소장하고 있다. 그런 백남준은 서구 시각에서 아시아 변방 국가인 대한민국의 또 다른 자부심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백남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되물어보자.

비디오를 예술로 활용하기 시작한 미술가, 텔레비전으로 로봇 같은 설치작품을 만든 작가,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기인(奇人).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있다는 사실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인 과천관 중앙부에 텔레비전 모니터 1,003개를 탑처럼 쌓은 비디오 설치작품 ‘다다익선’까지 안다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 로비에도 모니터 280개의 비디오 조각 ‘서울랩소디’(2001년작)가 영구설치돼 있다. 지난 2017년에는 백남준이 어린 시절을 보낸 종로구 창신동의 옛 집터를 ‘백남준 기념관’으로 조성해 개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남준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짐은 곧 국가다”라는 정복자의 화법으로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한 이유를, 그 말과 작품 안에 북방 유라시아를 누빈 유목민 칭기즈칸의 정신을 심어둔 까닭을 잘 모른다. 동양인으로 유럽의 최첨단 예술을 이끌었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살았던 백남준이 오늘날의 BTS(방탄소년단) 못지않은 한류(韓流)였다는 사실도 종종 잊혀지곤 한다.

백남준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던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육의전 포목상 집안으로 방직공장을 운영했기에 백남준은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고 일본에서 미술사와 음악사를 공부할 수 있었다.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헨대에서 음악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백남준 ‘칭기즈칸의 복권’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독일에서 스승 존 케이지(1912~1992)와 친구 요셉 보이스(1921~1986)을 만나면서 백남준은 전자음악, 일상의 소리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관심갖게 돼 음악과 미술과 춤을 다채롭게 접목하며 전자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갔다. 존 케이지는 1952년에 초연한 ‘4분 33초’라는 작품을 통해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은 채 침묵과 당황이 빚어낸 우연한 소음을 작품으로 해석했다.

요셉 보이스는 1963년 3월 독일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개인전 개막식에 느닷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 한 대를 때려 부순 것으로 백남준과 인연을 맺었다. 이 퍼포먼스와 전시는 미디어 아트의 출발점이자 서양미술이 근대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평가된다. 작가 자신은 “나의 인생에 행운의 하나는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보이스가 거의 무명 때에 만나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거장인 두 연장자와 역경 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하게 교우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따지자면 그들이 뿌린 씨앗을 백남준이 꽃으로 피우고 열매로 가꿨다 해도 과언 아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백남준인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제일 먼저, 가장 예리하게 그려낸 이가 백남준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술이 바꿀 우리의 미래를 예술적 언어로 보여준, 예언자였다. 19세기 사진의 발명이 그림과 조각이 주도하던 미술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이후, 백남준이 비디오를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예술의 혁명이었다. 백남준 연구자인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백남준의 로봇 작품은 작가의 강한 예술적 환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현대 인간상에 대한 풍자적 모방, 즉 인간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패러디”라고 설명했다.

비디오로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연 백남준의 ‘미디어 실험’이 추구했던 예술의 지향점은 또다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와 교차하고 있다. 그는 아직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74년에 이미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와 ‘W3(World Wide Web)’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20년이나 앞서 현대사회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것이었다. 보통 기술 발전은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 주지만 백남준의 관심은 기술이 서로 떨어진 공간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까지 엮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선보인 백남준의 일명 ‘위성 3부작’은 위성방송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백남준은 현재를 살며 미래를 내다봤지만 끊임없이 과거에서 영감을 끌어왔다. 과거의 우물에서 현재의 폭포를 이루고 미래의 분수를 쏘아 올렸으니 영매라고도 불렸고 천재로도 읽혔다. 지금 미국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은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백개의 TV모니터가 번쩍이는 백남준의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추고 주시하게 된다. 미술관 측이 전시 제목에 ‘1965-2018’이라는 연도를 붙인 것도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제작시기인 1965년을 시작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백남준의 ‘메가트리온 메트릭스’ 등 대형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백남준의 조카이자 저작권 상속자인 켄 하쿠다로부터 백남준재단의 아카이브를 확보해 백남준 연구의 중심부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게다가 오는 10월17일부터 영국의 국립미술관 격인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막을 올린다. 최대규모의 백남준 전시로 예상돼 세계 미술계가 기대하는 전시다.

전 세계적인 ‘백남준 재조명’ 작업에 맞춰 서울경제신문은 백남준과 장기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가까이서 그를 지켜봐 온 미술계 원로 및 전문가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인간 백남준’을 다시 쓰고자 한다. 백남준이 3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1984년 이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그 시기 백남준의 거의 모든 작업에 엔지니어로 항상 참여했던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를 비롯해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박영덕 박영덕갤러리대표 등과 전문가들의 생생한 기억을 통해 잠들어있는 백남준을 다시 깨워낼 참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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