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며 전격 사의를 표명한 후 법조계 안팎에서는 대권 가도를 향한 정치인 윤석열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검찰총장 취임 이후 정권 관련 수사로 지속적인 견제를 받다가 징계까지 당한 윤 총장이 ‘정치로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여권의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추진에 대해 최근 며칠간 날선 비판을 해온 윤 총장이 사퇴 이후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며 존재감을 키워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윤 총장은 4일 오후 2시 대검찰청 앞에 모인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윤 총장은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며 “이 사회가 어렵게 쌓아 올린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상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여당을 ‘반헌법 세력’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은 그들의 전횡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만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윤 총장은 검찰 바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겠다는 의미의 말을 덧붙였다. 윤 총장은 “검찰에서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라면서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윤 총장이 보내온 ‘검찰의 시간’은 이날로 끝나지만 앞으로 ‘정치의 길’로 나아갈 것임을 시사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격앙된 인터뷰는 정치 투신의 전조
이날 윤 총장의 전격적인 사의 표명은 최근 며칠간 내놓은 발언과 행보에서 이미 예고됐다는 분석이다. 윤 총장은 지난 1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여당의 중수청 신설 추진을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법치를 말살하는 것”이라며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윤 총장이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한 것은 27년 검사 생활에서 처음이다. 특히 인터뷰는 총장실에서 3시간여에 걸쳐 진행돼 형식과 내용 모두 이례적이었다. 더군다나 검찰은 다음 날 윤 총장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보완 설명을 제공하는 등 윤 총장의 발언을 지원 사격했다.
다음 날에는 윤 총장의 더욱 격앙된 발언이 공개됐다. 다른 언론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중수청 설치로 인한 피해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거론하며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라는 뜻”이라고도 했다. 다음 날 대검은 이 전화 통화가 기사를 전제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윤 총장의 발언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보수 텃밭 대구서 ‘국민’ 수차례 강조
윤 총장은 전일 대구고·지검을 찾은 자리에서는 한층 더 발언 수위를 높였다. 윤 총장은 “지금 진행 중인 소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의 완전 박탈)’은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이라며 “헌법 정신에 크게 위배되고 국가와 정부에 헌법상 피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권을 향해 부패가 싹트는 환경을 만들려 하고 있다고 질타한 것이다. 이어 윤 총장은 ‘정치 의향이 있는지’라는 질문을 받고 “이 자리에서 드릴 말씀이 아니다”라며 명확히 부인하지 않았다.
또 검찰은 대구고·지검 검사들과의 간담회에서 나온 윤 총장 발언을 공개하며 윤 총장의 속내를 추가로 전파했다. 윤 총장은 “검사 생활에서 처음으로 인터뷰라는 것을 해봤다”며 “국민들에게 올바른 설명을 드리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라는 발언 등으로 인터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또 윤 총장의 발언에는 ‘국민 피해’ ‘국민 보호’ 등 국민이란 단어가 수차례 제시됐다. 윤 총장이 보수의 텃밭인 대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한 데 대해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했다는 게 중론이다.
◇대선 1년 전 사퇴…'출마 제한법' 의식한듯
이날 윤 총장의 사의가 예상보다 빨랐다는 반응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검찰개혁특별위원회에서 중수청 법안을 확정하기도 전에 총장직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에 윤 총장이 ‘윤석열 출마 제한법’의 통과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 법안은 검사로서 퇴직 후 1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공직 후보자 등록을 할 수 없게 한 검찰청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은 부칙에서 이미 퇴직한 검사에게도 같은 내용을 적용하도록 했다. 다음 대선인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은 내년 3월 9일이다. 만일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시행될 경우 1년 전인 오는 9일 이후 윤 총장이 퇴직하면 출마길이 막힌다.
다만 윤 총장의 중수청에 반대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퇴밖에 없었던 만큼 단지 시일이 당겨진 것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석동현 전 검사장은 “지금 상황에서 공무원이 거취를 내놓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라고 했다. 고검장 출신 변호사는 “직을 유지하는 게 더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 상황”이라며 “달리 움직일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
/조권형 기자 buzz@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