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머리를 한 붉은 몸체가 새하얀 전시장 곳곳을 부유한다. 아래로 길게 흘러내리는 뜨개 조각과 실타래들은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한편으로는 쏟아지는 붉은 내장을 연상시키며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관람자가 내부까지 걸어들어갈 수 있도록 설치된 작품 '붉은 새들의 의례'는 주변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며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까지 드러낸다. 전시의 또 다른 중심은 점묘 드로잉이다. 대기로 숨을 불어넣는 감각 아래 붉고 푸른 점들을 종이 위에 반복적으로 찍었다. 들숨과 날숨의 리듬에 맞물려 피어난 부드러운 선들은 공기 중으로 번지는 호흡의 경로를 상상하게 한다.
서울 성북동 우손갤러리에서 9일 개막한 조재영(46) 작가의 개인전 ‘숨 숨숨'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4년 만에 여는 개인전을 신화·인류학적 탐구가 집약된 20여점의 신작으로 모두 채웠다. 작가의 기존 작업을 알고 있는 관람자라면 이번 신작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작가는 전통 조각은 잘 사용하지 않는 종이를 재료 삼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조각'을 주로 선보여 왔다. 기하학적 형태를 활용한 모던한 추상 조각으로 뚜렷한 형태감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번 신작들을 관통하는 감각은 곡선의 유연함이다.
실제로 작가는 "작품 세계에 변화를 겪고 있는데 그 변화가 반영된 전시로 내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는 '어떤 존재는 고정된 실체나 주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그런 고정값을 해체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며 "그리고 이제는 '고정값이 해체된 후 존재는 어떻게 존재할까'라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온 단계"라고 설명했다. 꾸준한 탐구 끝에 내린 결론은 '관계'다. 작가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계속 변형하며 존재한다는 걸 배워가는 중"이라며 "인류가 아주 오랜 시간 세계의 타자들과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해온 감각을 표현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모티프는 공기와 물, 불과 같은 자연의 물성과 새이다. 작가는 "공기나 물은 어딘가 고여 있거나 머무르지 않고 흐르고 부유하며 변화한다"며 "고정된 존재 아닌 동적으로 흐르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새의 경우 동서양의 수많은 신화에서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작가는 새를 통해 경계와 연결을 상징하는 조형적 상상을 구현한다.
전시의 또 다른 키워드는 '직조'와 '호흡'이다. 이질적인 존재들이 얽히고 반응해 새로운 생명력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씨실과 날실이 자아내는 직조로 시각화했다. 실제로 설치 작품을 이루는 재료의 핵심이 손으로 뜬 편물이다. 점묘로 그린 유기적인 선들이 마치 정맥처럼 흐르는 붉은 드로잉 작품들을 바느질로 한땀 한땀 엮어 연결과 연속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같은 매듭과 선들의 엮임은 호흡의 리듬을 따라 흐른다. 작가는 "점묘를 하다보면 내가 주체적으로 선을 그린다기 보다는 대기 중에 원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경로를 내가 찾아 점을 찍는 것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세계의 시작점에 원형으로 존재하던 하나의 호흡이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숨결로 갈라지면서 세계를 만들어가는 상상과 함께 선들의 흐름을 따라가기 바라며 전시 이름을 정했다"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8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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