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를 보면 정치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한 정치학자는 “전 세계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아 정치학 과목 중에서 정치 발전론이 시들해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했다면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발붙이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참석자들은 양극단 세력이 판치는 한국 정치를 걱정하며 나름의 해법들을 내놓았다.
실제로 우리 현실을 보면 정치가 후진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이 초강경파인 정청래 대표를 뽑은 데 이어 국민의힘이 초강성 ‘반탄파(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파)’인 장동혁 대표를 선출했다. 정 대표는 8·2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뒤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며 국민의힘 대표와의 악수도 거부하고 있다. 그는 계엄 사태 연루를 주장하면서 “국민의힘을 해산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다”면서 제1야당 해산론까지 꺼냈다. 여당인 민주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의 힘으로 기업 부담을 가중시키는 ‘노란봉투법’과 더 센 2차 상법 개정안 등 야당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 대표는 또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사법 개혁을 폭풍처럼 몰아쳐서 전광석화처럼 끝내겠다”면서 ‘개혁 속도전’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출마했던 김문수 후보보다 더 강경한 우파인 장 의원을 새 사령관으로 내세웠다. 장 대표는 당선 직후 “모든 우파 시민과 연대해 이재명 정권을 끌어내릴 것”이라고 대여 투쟁을 선언했다. 그는 계엄·탄핵 사태에 대해 반성의 뜻을 밝히기보다는 “내부 총질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결단하겠다”며 ‘찬탄파’를 먼저 겨냥했다. 정치권에선 “정청래호와 장동혁호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게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가 장 대표 취임 직후 “내란은 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라며 선제 공격을 가하자 장 대표는 “왜곡과 망상으로 점철된 정치 공세”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잖아도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조국 사태’ 등으로 국민 의식은 분단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여야의 두 사령탑이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본다면 국론 분열은 더 깊어질 것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여야 새 대표의 이름을 따서 “‘청동’ 시대로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웃픈 얘기까지 나온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라고 규정했는데 한국도 극단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 ‘파국의 시대’를 맞은 뒤 25~30년 동안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룬 ‘황금의 시대’를 거쳐 1970년대 중반 이후 해체·불확실성·위기가 만연한 ‘산사태(landslide) 시대’를 겪었다. 한국도 해방 이후 분단·전쟁·빈곤 등의 파국을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표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데 이어 불확실성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우리는 극심한 이념·정파의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다.
한국에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이 밀려오고 있다. 내수 부진과 관세전쟁에 따른 수출 둔화가 겹쳐 저성장 고착화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와 러시아 밀착 등으로 안보 불안도 고조되고 있다. 각자도생 시대에 한국이 글로벌 정글에서 생존하려면 국력을 결집해 첨단기술 개발과 구조 개혁으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여야가 권력 싸움에 매몰된다면 과거 코미디 유행어인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경제와 민생을 챙기려면 상대를 인정하면서 합리와 상식을 토대로 숙의(熟議)하는 의회민주주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특히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을 쓴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강조한 민주주의 가드레일인 관용과 절제의 규범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심을 존중한다”고 했다. 도쿠가와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리더십을 지닌 인물로 유명하다. 여권부터 속도보다 설득과 인내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여야 모두 극한 대립 정치의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소를 제대로 키울 수 있다. 홉스봄의 저서 ‘극단의 시대’ 마지막에 나오는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 결과는 암흑뿐이다”라는 구절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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