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 관련 법률에 5800여개의 경제형벌 규정이 존재해 기업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경미한 위반 사항의 경우 비범죄화 등을 논의해 경제범죄와 경제형벌의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22일 한국경제인협회에서 ‘경제활동 보호와 법질서 확립을 위한 경제형벌제도의 혁신과 과제’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배상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날 ‘경제형벌 합리화를 위한 개선방안’을 주제로 발제하며 “현재 414개 경제 관련 법률에 5886개의 경제형벌이 존재한다”며 “경미한 의무 위반에도 징역이나 벌금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소한 행정 의무 위반에도 형벌이 부과되는 사례가 많아 기업활동 위축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며 “경미한 사안은 과태료·과징금 등 행정제재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불가피하게 형벌이 필요한 경우에는 과실의 정도나 미수 여부 등에 따라 형량을 세분화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배 부연구위원은 “선행정 제재를 부과한 뒤 미이행 시 형벌로 이어지는 단계적 접근을 고려해야 한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범죄는 엄벌로 처벌하되, 단순히 행정 목적 달성을 위해 형벌을 남용하는 문제는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손창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은행 조사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4~5위권을 차지한다”며 “인프라는 잘 구축돼 있지만 사전규제적 성격 때문에 기업인들이 체감하는 부담은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한국의 경제규제는 사전규제적 성격이 강하다”며 “형사규제를 행정·민사 규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고, 배임죄 등 형사규제 의존을 줄이려면 주주대표·이중대표소송 등 민사적 구제수단이 실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준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 기업제도팀장은 “5886개의 경제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경제가 얼마나 촘촘한 형벌의 틀에 갇혀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의 잘못에 대해 중복 처벌이 더 쉬워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주가조정이나 대규모 금융사기처럼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악의적 경제범죄는 지금보다 더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면서도 “현재의 과도한 형벌 체제는 중대범죄와 경미한 행정위반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업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가 적극 협조하고 경제계와 소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시장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란봉투법 시행에 따른 입법적 균형을 위해 현행 업무상 배임죄의 합리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노란봉투법 도입에 따른 기업의 형사책임에 대한 입법적 균형 방안’을 주제로 두 번째 발제에 나선 김영종 변호사(코리그룹 부사장)는 “노란봉투법과 상법상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까지 법제화되면 기업 경영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배임죄든 업무상 배임죄든 현실적으로 법 적용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며 “손해개념의 모호성, 경아주단 원칙과의 충돌 등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 경영은 본질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인데, 실패가 곧 형사처벌로 이어진다면 경영자들이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선 방안으로 손해개념의 구체화, 경아주단 원칙의 법제화, 양형기준 세분화, 수사기관 책임 강화 등을 제시했다. 또 “정당한 형량을 선고받을 권리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승격시켜야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양형기준을 법률로 제정하고, 양형위원회를 국회 소속 또는 독립기관으로 설치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