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노비는 마당을 쓸거나, 주인에게 굽실대거나, 혹은 툭하면 얻어 맞는 양반의 소유물이다. 조선은 아예 법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ㆍ공업ㆍ상업ㆍ병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못박았을 정도로 신분제에 있어선 엄격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노비는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지금으로 말하면 자영업자나 고용 노동자처럼 서민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조선시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 중 최소한 30%를 차지할 정도로 조선 서민의 모습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이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조선 시대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노비가 벼슬길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학문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인수(1521~1592)는 중추부지사를 지낸 신발의 노비 신분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서경덕에게 유학을 배우고 거문고를 취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매일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절을 올렸으며 주인인 신발의 아들 신응구와 금강산에 머물며 함께 글 공부를 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저자는 이런 모습이 비단 박인수만의 사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중종 대의 문신으로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1540) 역시 태생은 박인수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노비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이 남긴 '성호사설'에 따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인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꼬마 노비의 영특함을 높이 사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는 15세기 재상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다. 주인은 노비 신분으로는 아이가 재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해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의 양자로 보냈고 나중에 이 아이는 대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일부 노비 중에는 재산을 축적해 부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조선 태종 대의 의흥삼군부의 좌군에 속한 공노비였던 불정은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부자 노비였다. 선조 대 성명 미상의 공노비는 당시 한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성산월을 차지할 정도로 재산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노비의 저항은 거세졌고 조선 후기에는 지배층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저항이 극에 달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임금노동자제도가 조선 후기에 각광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임금노동자가 차츰 대세를 이루면서 1894년에는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저자는 "1894년에 벌어진 사건은 노비제도를 폐지한 사건이 아니라 노비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확인한 사건"이라며 "조선 시대 서민이라 할 수 있는 노비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일반 대중의 삶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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