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로터리] 공직자와 영혼


재무부 사무관이었던 당시 지난 1989년4월에 발족한 '금융실명제실시준비단'에 참여해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있었다. 정계와 학계를 포함한 각계 인사 간 치열한 논쟁 끝에 정부는 이듬해 4월 '경제활성화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실명제 실시를 무기한 연기했다. 실명제 필요성을 주장하던 준비단은 이제 연기의 필요성을 홍보해야 했다. 축구에서 골대가 갑자기 바뀐 것이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 사무관 10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장관은 "경제공무원은 경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실명제 실시와 연기 과정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장관에게 도발같이 보일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윗사람의 결정이 자신의 철학과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관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윗사람의 결정을 따르면 된다"였다. "그렇다면 굳이 철학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장관과 논쟁을 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 후 정권교체에 따른 정책변화를 놓고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잊고 있던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봤다. 행정부는 국가 의사의 결정과 집행을 위해 대통령, 총리, 장관, 각급 공무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조직이다. 의사결정권은 직급별로 배분돼 있고 하위직급자는 상위직급자의 의사결정을 보조한다. 본인 내지 상위직급자의 의사결정을 집행한다. 업무를 효과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공직자들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철학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공직자들이 각자의 철학과 비전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다면 국민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국정은 마비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공직에 생각과 철학이 동일한 사람을 임용하면 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안은 주요 상위공직에 생각과 철학이 비슷한 사람들을 임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포함한 모든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정무직제도다. 정무직에는 취지에 따라 통상 비전과 철학이 정권의 입장과 같거나 비슷한 사람을 임용한다. 그러나 정무직을 제외한 공직에 임용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분 보장을 통해 오히려 정치적 임용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공직제도는 정무직이 아닌 공직자들에게 정권교체로 바뀐 정책 결정을 보조하거나 집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정무직이 아닌 공직자에게 '영혼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공직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거나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견강부회일 뿐이다. 공무원은 "철학은 갖되 윗사람의 결정에 따르면 된다"는 장관의 말씀이 정답인 셈이다.

공직자에게 소신 있는 업무수행을 요구하고 잘못에 대해 엄중하게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획일적 비판으로 모든 공직자의 사기를 지나치게 위축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요즘 '관피아' 논란도 획일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인다. 건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직자 스스로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과 함께 공직자들이 공무 담당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비판의 자세가 필요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