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또다시 추락하면서 지난해 여름 이후 글로벌 메이저 석유업체들의 신규 투자 보류 규모가 2,0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최근 3개월간 미 에너지 기업들의 감원 규모는 5만명에 달하면서 2차 해고 폭풍이 불고 있다. 증시나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점점 어려워져 유가 하락세가 지속될 경우 유동성이 부족한 중소형 에너지 기업들이 도미노 파산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2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너지컨설팅 업체 우드맥킨지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여름 국제유가 하락 이후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2,000억달러 규모의 신규 프로젝트를 중단했다고 전했다. 투자가 미뤄진 석유ㆍ가스전 개발 프로젝트는 총 46건으로 매장량은 200억배럴 규모에 달했다. 이는 멕시코만 전체 매장량보다 많은 수준이다.
지난 5월 노르웨이 리서치 기관인 뤼스타에너지는 1,180억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가 보류됐다고 집계했지만 불과 두 달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추락하던 국제유가는 올 3월 들어 안정세를 되찾는 듯했지만 이란 핵협상 타결과 중국 경기둔화 등에 따른 공급과잉 우려로 5월 이후 20%나 급락한 상태다. 24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48.14달러로 3월31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우드맥킨지는 "대형 석유업체들이 저유가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최종결정 단계에서 투자를 보류하고 있다"며 "올해 안에 최종 승인이 떨어질 대형 프로젝트 수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자가 보류된 프로젝트의 절반 이상은 개발비용이 큰 멕시코만·서부아프리카 등의 심해유전에 몰려 있다.
미 에너지 업계에는 제2차 해고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부 생산업체는 올봄의 유가반등 추세가 올 하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인력 채용을 시작했다"며 "최근 유가 하락으로 당초 발표보다 더 많은 해고를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유서비스 업체 베이커휴즈를 인수한 핼리버튼은 지난주 양사를 합쳐 2만7,000명의 감원계획을 밝혔다. 이는 2월에 발표했던 1만3,500명의 2배나 되는 규모다. 탐사업체인 코노코필립스도 올 들어 이미 1,500명의 인력을 줄인 데 이어 추가 감원에 나설 계획이다.
컨설팅 업체인 그레이브스에 따르면 미 에너지 기업들은 지난해 가을 이후 이미 10만명을 감원한 데 이어 지난 3개월간 5만명을 추가 해고했다. WSJ는 "초기 해고가 시추·장비 제조업체 등 현장 노동자에게 집중됐다면 지금은 엔지니어·과학자로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더구나 이 같은 비용절감 노력에도 에너지 기업들의 자금사정은 갈수록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올 상반기 유가반등에 힘입어 57개 기업은 210억달러어치의 신주를, 58개 기업은 730억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하지만 유가 하락이 지속되면 더 이상 막대한 월가 자금이 유입되기 힘들다는 게 WSJ의 설명이다.
유가 하락 때 손실을 막아주던 헤지 프로그램의 만기가 올가을에 속속 돌아온다는 점도 우려되는 요인이다. 통상 미 에너지 업체는 연간 예상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헤지하지만 내년도 생산물량은 15%에 그친다. 투자가들의 손실 가능성이 커지면서 헤지상품 발행 물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에너지 투자은행인 시몬스인터내셔널은 "부채가 많고 유동성이 부족한 에너지 기업들은 파산에 직면할 수 있다"며 "다른 기업들은 현금 확보를 위해 파이프라인 등 자산을 매각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건스탠리는 "만약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의 막대한 공급량이 지속되고 리비아와 이란이 석유 생산량을 회복하면 유가는 향후 3년간 배럴당 60달러를 밑돌 것"이라며 "유가 하락이 1980년대보다 더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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