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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씨의 ‘감정수업’이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48개의 감정을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끌어내며 스피노자의 감정과 감성에 대한 이야기를 횡단하는 저자의 통찰이 빛난 글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소비하는 것은 ‘감정’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들은 ‘힐링’이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편안함’이나 ‘깨끗함’이라는 정서적 가치와 연관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 들어 기 수련을 하거나, 요가를 배우면서 몸과 마음을 함께 정화하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건강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감정 수련’이라는 통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규모 집단에 소속돼 있어도 심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데 하루에도 수백 명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때로는 분노가 치밀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이를 절제하고, 가장 전문적인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 중 하나가 항공사 승무원입니다. 국내교통량에서 항공 부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다른 서비스의 질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경영학자인 제이 바니 오하이오 주립대학 교수는 ‘자원 기반 이론’에서 차별화에 의한 경쟁 우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치 있고(Valuable), 희소하며(Rare), 그 안에서의 여러 자원과 역량들이 내부적으로 조직화(Internally Organized, VRIO 모델이라고도 함)돼 있는 것이다.’ 국내에도 저가항공사가 많이 생겼지만, 전통 강호인 두 항공사가 건재한 것은 상대적으로 비싸더라도 더 좋은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격뿐만 아니라 ‘서비스의 질’ 역시 차별화 경쟁우위가 존재하고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식 서비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고려를 건국했던 왕건이 호남 지역을 평정하고 나주에 이르렀습니다. 며칠 밤을 새 가며 대군을 이끌고 호남까지 내려온 그가 목을 축이기 위해 어느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려 했습니다. 그러자 한 여인이 그 우물 곁에서 직접 물을 길어다가 왕건에게 바치면서 나뭇잎을 박 안에 띄웠답니다.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싶어 왕건이 조심하도록 미리 배려한 것이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고객의 상황에 맞는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 것입니다. 잠재적 욕구를 끌어내는 데 효과적인 전략인 셈입니다. 효율성과 신속성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세계적 수준의 서비스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를 들썩인 ‘땅콩 리턴’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것도 서비스 차별화로 이름 난 항공사에서. 이는 우리가 감정 노동자에 대해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서비스 선진화를 통해 제조업에서 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자고 하면서도, 정작 그 분야에서 일하는 에이전트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박한 것이 사실입니다. 서비스 매니지먼트 분야의 전문가인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최선미 교수에 따르면 서비스 수용자에 해당하는 고객뿐만 아니라 서비스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직원, 승무원 등의 감정도 성과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직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에게 매우 절도있는 행동을 요구해 왔습니다. 서비스 에이전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회사의 얼굴이자 고객이 회사를 만나는 인터페이스라는 전제하에 그들을 단속하는 데만 치중한 것입니다. 직원들 역시 많은 것을 감내하고 스스로 단련해가며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에 대한 박한 대우는 우리가 상당히 많은 자본적 가치를 감정 노동에 기대고 있으면서 정작 현장의 생산자들에게는 인색한, 즉 매우 모순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소위 사회의 엘리트로 불리는 고객이 행하는 비도덕적인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평소 절제된 행동을 강요받음으로써 억눌렸던 감정을 배설하기라도 하듯,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과도한 예우를 요구하거나, 자신이 지불한 돈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제공하도록 호통치는 모습에서 ‘구조화된 불평등’이 우리 사회 저변에 녹아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절감합니다.
항상 모순은 변화의 필요성을 가져옵니다. 한때는 최고의 장점이었던 것이, 최고의 약점이 되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어느덧 감정노동과 서비스에 기반한 생산성이 상당한 수준을 넘어선 지금, 화려한 결과 뒤에 숨죽여 눈물 흘리고 있는 이가 더 없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사건들처럼 이번 일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잠잠해졌다고 해서 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속적 모니터링 기제를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수반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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