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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대선후보 이명박 확정] MB 라이프 스토리

'자수성가 신화' 청와대 입성 "도전"<br>지독한 가난 딛고 고려대 입학…6·3사태때 복역<br>현대건설 우여곡절 입사후 35세때 사장 자리에<br>96년 종로서 의원 재선…서울시장땐 '청계천 신화'도


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명박 후보의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 후보는 찢어지는 가난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최고기업의 최고경영자(CEOㆍ현대건설 회장)와 서울시장을 거쳐 이날 대선후보 확정에 이르기까지 고비 고비마다 극적인 반전을 만들며 ‘신화 아닌 신화’를 연출해내 실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스무살이 넘도록 떨어질 줄 몰랐던 가난=이 후보는 지난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목장 노동자인 이충우(포항시 북구 흥해읍 출신. 1981년 작고)씨와 대구 반야월 출신 채태원(1964년 작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4남3녀 중 다섯째. 어려운 형편 탓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 채씨를 도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특히 둘째 형 상득씨(현 국회 부의장)가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인정받으면서 그는 시장통에서 어머니와 함께 풀빵ㆍ뻥튀기ㆍ과일ㆍ생선 등을 팔아 집안의 생계와 손위 형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렇다고 그는 어머니와 가족들에 대해 원망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할 수 있다’는 생활 의지로 자신 나름의 길을 만들어갔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중학교 내내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으며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으며 끝까지 1등을 했다. 그는 “귤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도록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59년 12월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에 진학한 형 상득씨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놓고 노점상을 했다. 방이 너무 좁아 같이 잘 수가 없어 달동네 합숙소에 들어가 일용노동자 생활을 했다. 매일 새벽 일자리를 찾아 달동네 산꼭대기에서 허겁지겁 달음질을 쳐야 했다. 당시 그의 꿈은 “매일 출근하고 월급받을 수 있는 월급쟁이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 이 시기를 이렇게 돌아본다. “고교 입학할 무렵 나는 뻥튀기 장사를, 어머니는 국화빵 굽는 작업을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얼굴에는 땟국이 녹아 흘렀다.” ◇두 번의 전환점, 고려대 입학과 현대건설 입사=그가 경선 기간 내내 말했듯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고려대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대학시험에 합격만 하면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대학 중퇴 학력은 된다”는 게 신분 상승을 위해 몸부림치던 그에게 도전의욕을 심어줬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1961년 마침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 상대 학생회장까지 지낸다. 바로 전년에 있었던 4ㆍ19혁명과 이에 앞서 있었던 고대생들의 4ㆍ18학생의거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학 시절 그는 한일 국교정상화 6ㆍ3반대시위를 주도했다가 6개월간 복역하고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명박 캠프의 공동선대 위원장 맡고 있는 김덕룡 의원 등 6ㆍ3세대 의원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 것도 이 같은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전환점은 현대건설 입사였다. 학생운동 전력과 복역 경력 등은 그가 ‘샐러리맨’이 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필기시험을 치르고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당시 인사부장은 ‘운동권’이라는 전력 때문에 난색을 표명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내 학생운동 전력을 밝히고 그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 진출을 막지 말라고 비판했다. 며칠 후 청와대 이낙선 비서관의 연락이 왔다.” (신화는 없다) 그러나 이 비서관은 “학생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국영기업체나 해외유학을 갈 생각이 있다면 밀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거절했다. 비굴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비서관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있은 후 현대건설로부터 출근하라는 통보가 왔다. ◇샐러리맨의 신화=현대건설 중기사업소에 과장으로 근무할 때는 인근에 있던 골재생산 업체인 공영사와 분진문제로 말썽이 잦았다. 공영사는 분진방지 시설을 갖추기로 약속하고도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청와대에 공급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작업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여섯 시간의 말미를 주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공장을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경고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직접 불도저를 몰고 공영사로 향했다. 트럭이 드나드는 공영사 진입로를 불도저로 깊숙이 파버렸다. 도로를 사실상 봉쇄해버린 것이다.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지만 “공영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고속도로 공사를 못하게 생겼다”며 공영사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결국 공영사는 무릎을 꿇었다. 사장이 된 후에도 그는 위험과 도전을 즐겼다. 이란ㆍ이라크ㆍ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휘젓고 다니며 대형 공사들을 잇따라 따냈다.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장쩌민 중국 주석 등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1980년대 신군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정책은 현대그룹에 큰 위기였다. 정책의 골자는 현대ㆍ대우ㆍ아세아자동차를 하나로 통합하고 옥포조선과 현대중공업ㆍ현대양행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국보위는 현대에 발전설비를 맡길 테니 자동차는 포기하라고 했다. 국보위의 압력에 정주영 회장은 회사 도장을 그에게 넘기고 발을 뺐다. 국보위에 불려간 그는 끝까지 버텼다. 경쟁구조는 시장경제의 원리이자 원동력이라는 논리를 끝까지 꺾지 않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돌아간 현대 사옥에는 정 회장이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를 끝냈다. 문학적 수사로만 알았던 피눈물이 실제로 흘렀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 후보는 1965년 입사 후 27년간 현대그룹에서 일하면서 현대건설 회장 등 CEO로 업적을 쌓게 된다. 특히 입사 12년 만인 1977년 35세 때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 오르며 ‘샐러리맨 신화’를 쓴 그는 지금도 수많은 기업가 지망생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정치인으로 변신, 대권으로의 마지막 도전=그는 정치인으로 마지막 변신에 도전했다. 1991년 노태우 정권 말기에 현대그룹 정 회장이 정치에 뛰어들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나섰다. 기업인이 정치에 나서면 너무 큰 위험이 따른다며 극구 말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1992년 1월 이 후보는 현대건설 회장직을 끝으로 현대그룹을 떠났다. 그런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김영삼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다. 대권을 노리고 있던 김 대표는 ‘전문경영인’ 영입이 필요한 차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95년 지방선거 때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했다. 또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정치1번지 종로구에서 이종찬ㆍ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돼 비로소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선거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을 내놓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2년 민선3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그는 화려하게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이 기간 청계천 복원, 대중(버스)교통체계 개편 등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자타 공인의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신화’ 등의 단어 자체가 보여주듯 그는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명망가 위치에 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신화를 쓴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지금 지지율 1위 정당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며 17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기업을 경영한 경험과 1,000만 시민의 살림을 책임진 경험을 가진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청와대를 향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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