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육성 위해 전시회마다 기회 주고 미술·건축사 등 대안 예술교육도 활발
문화융성 힘보태고 싶지만 재정이 발목… 정책 지원·기업 상생방안 있었으면…
어쩌다 보니 미술관이 '돈 많은 사모님의 최상급 사치'로 여겨지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재력가 중에 미술 애호가와 굵직한 수집가가 많기는 하나 실제 사립미술관장 상당수는 '꼭 돈이 있어서' 미술관을 만든 것은 아니다. 돈보다 더 값진 사명감에 투신한 이들이 더 많다. 우리나라 등록 사립미술관 1호인 토탈미술관의 노준의(68·사진) 관장이 후자에 속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 미술관장의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달리 20년 이상 짧은 은발을 자랑하는 것부터 그는 다르다. "돈 많아서 미술관 운영하는 줄 알죠? 돈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가진 돈이 많아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 관장이 미술관을 개관한 것은 지난 1984년. 남편이자 건축가인 문신규 토탈디자인 회장이 토탈미술관의 설립자로, 아내가 관장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는 경기도 장흥에 토탈야외조각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야외 미술관 역시 국내 1호였다. 재벌도 아닌 이들이 미술관을 연 것은 순수했으나 다소 무모했다.
부부는 아름답고 멋진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등록 특허가 100개 이상인 문 회장은 아이디어 뱅크였고 부창부수(夫唱婦隨) 노 관장이 생각보다 더 근사하게 실행해 보였다. 장흥의 조각미술관은 손수 터를 다졌고 현재 평창동 미술관은 문 회장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건물이다. 시작은 1976년 대학로에 연 도자기·금속·장신구 등 디자인 영역을 아우르는 '토탈갤러리'였다.
"당시 해외 첨단 디자인을 소개하기 위해 '꾸밈'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죠. 권명광 전 홍익대 총장이 1호 표지를 맡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오광수씨가 편집장에, 목원대 건축과 교수 김정동씨가 꾸밈지 평론가 출신이에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안상수씨도 에디터를 했고 배병우 작가가 사진을 맡았죠. 지금은 기라성 같은 이들이 모두 우리 식구였네요."
그 시기를 지나 1980년대는 경제와 문화가 함께 커갔다. 경기 호황으로 새 건물이 연일 들어서던 때 노 관장은 인테리어와 연계한 작품과 외부 조형물 컨설팅을 했다. 디자인뿐 아니라 순수 현대미술을 눈여겨보는 계기가 됐다. 1978년에 토탈갤러리와 병행해 장흥에 토탈야외조각전시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사고파는 갤러리는 많았어도 영리 목적 없이 전시와 관람만을 위한 사립미술관은 없었던 시절에 토탈미술관이 개관했다. 카페 '세시봉'이나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공간사랑' 소극장 등이 문화의 산실(産室)이던 그즈음 현대미술은 '토탈'에서 성장했다. 지금도 난해한 현대미술이 더욱 희한하고 기괴하게 여겨지던 시절이다. 1987년 정부에 첫 사립미술관으로 등록을 승인받았다. 토탈미술관은 작품 수집보다 작가를 키우는 게 우선이었다. 수천만원의 전시 비용을 써가며 국제전을 기획할 때는 반드시 국내 작가를 함께 선보이거나 교환전 형식으로 진출 기회를 열어줬다. 그전까지 서울대와 홍대가 번갈아 독식하던 국내 미술상의 '비정상'을 토탈미술상이 깼다. 200만원 이상의 사전 제작비와 대규모 개인전 기회를 제공한 것도 파격적이었다.
"연이어 1996년에 국내외 원로와 신진을 엮은 '프로젝트8'을 기획했는데 첫해는 독일과 함께 거장 토니 크랙과 토마스 루프, 미샤 쿠발과 클라우스 폼 브루흐를 데려왔고 우리는 원로 2명과 젊은 작가 2명을 엮어 이우환과 전수천, 김동연과 김영진을 보여줬어요. 그해 광주비엔날레에 맞춰 9월3일 연 개막파티에 세계 미술계 거물이 다 몰려왔어요."
대성공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앞다퉈 공동전시를 제안했다. 토탈미술관을 거쳐야 작가가 성장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서보·김봉태·김종학·윤명로·김차섭·전성우·하인두 등 1960년대 현대미술 2세대 작가를 조망했고 아예 1960년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는 기획전도 열었다. 큐레이터도 이곳에서 함께 컸다. 김원방·이영철·이용우·이원일·정준모 등이 대표적이다.선구안이 밝은 노 관장은 민간 차원의 대안적 예술교육을 국내 최초로 시작했다. 장흥조각미술관의 분관 격으로 평창동에 미술관을 연 1992년 그해 시작한 '토탈 아카데미'는 올해로 22기를 맞았다. 단 한 해도 거른 적 없다. 문화가 꽃을 피우려면 교육으로 비옥한 토양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사·건축사·디자인론·철학·역사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그 어떤 강좌도 '재탕'한 적 없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워요. 이런 교육 프로그램이 문화의 켜를 넓히고 축적해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문화선진국은 지역의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얼마나 활성화되느냐에 달려 있어요. 미술교육은 그림 그리기 학습만이 아닙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작품 체험과 예술가들의 창의적 생산과 사고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해야 진정한 창의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거죠. 큐레이터가 교육을 수행하는 '에듀케이터'를 양산해 보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관(官)이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립미술관이 적극적으로 보완하고 대안 교육 모델을 제시해야 합니다."
뒷얘기지만 1996년 토탈미술관 전시 당시 8,000만원이던 크랙의 조각은 5년 뒤 크리스티 경매에서 40억원에 낙찰됐다. 작품 몇 점만 사 뒀어도 재산이 수십 배로 불었을 텐데 전시 비용을 쓰기만 했지 사모을 돈은 없었다. 몇 차례 재정위기 후 장흥의 토탈야외미술관은 2005년 가나아트갤러리에 매각했다. "몇 번이나 닫을 생각을 했고 그 고민은 지금도 하고 있어요. 재작년에 세계적 건축가그룹 MBRDV의 전시를 유치할 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다행히 기업의 후원을 받았어요. 대신 수억원짜리 작품을 사옥 조형물로 설치해드렸죠. 그렇게라도 (미술관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좋은 전시 콘텐츠를 큐레이팅 해두면 그런 후원자가 나타날 것 같긴 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미술관은 대기업이 했어야 한다는 노 관장은 지금도 고민한다. 시대를 앞서 간 지식인과 예술인은 늘 고달팠는데 20년 이상 앞서 간 토탈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반짝이는 은발은 멋이 아니라 고민의 흔적이다. 문화융성의 국정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사립미술관의 다양성은 필수적이지만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나 뜻맞는 기업과의 상생 방안은 요원해 보인다.
She is ...
△1992년 토탈미술관 평창동 분관 개관 △2005~2010년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초대 회장 △2007년 서울문화재단 이사 △2007~2010년 한국박물관협회 부회장 ◇수상내역 △1998년 전국박물관인대회 우수미술관 선정 △2003년 제8회 월간미술상 특별부문 대상 △2006년 전국박물관인대회 국무총리상 △2009년 한국박물관협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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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