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이머징국가(신흥국)끼리 투자를 주고받는 '남남 자본교류'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는 유럽이나 좀처럼 성장세에 탄력을 받지 못하는 미국 대신 이머징시장이 글로벌 투자의 중심무대가 되고 있으며 이들 시장의 주연 역시 국부펀드 등 이머징국가 투자가들이다.
최근 원자재를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초대형 항만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브라질의 EBX그룹이 아부다비 국부펀드에 지분을 5% 넘겨주는 대신 20억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 같은 흐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일(현지시간) 이머징국가들의 국부펀드나 기업들이 이머징시장을 찾으면서 글로벌 자금이 지구의 남쪽과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딜로직에 따르면 글로벌 인수합병(M&A) 때 이머징시장에서 사고 파는 거래 비중은 지난 2000년 2%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2%로 크게 늘어났다.
또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등 브릭스 국가의 연간 M&A 규모는 110억달러로 5년 전의 6억달러와 비교해 20배 가까이 급증했다. M&A뿐 아니라 이머징국가 간 공동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직접투자펀드(RDIF)와 중국의 중국투자공사(CIC)는 함께 양국 기업들에 투자할 목적으로 20억달러의 조인트벤처를 조성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당시 러시아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의 방중 때 양국 간에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지난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밀켄연구소의 국제경제 콘퍼런스에 참가한 가오 시칭 CIC 사장은 글로벌주식시장에서 이머징시장의 비중이 5%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은 전체 자금의 15~20%를 이머징시장에 투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 및 유럽 펀드매니저들도 이머징국가 고객들로부터 이머징시장에서 투자 대상을 찾으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짐 매카헌 프린스펄글로벌인베스터스 대표이사는 "고객들에게 글로벌 에쿼티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하면 당장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 이머징시장에서 투자 대상을 찾아줄 수 있느냐는 반응이 돌아온다"고 소개했다.
이머징시장이 서구에 비해 한층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는데다 경제 이외의 정치적 요소도 이머징국가 간 자본교류를 촉진하고 있다. 가오 사장은 이와 관련, "서구 국가의 정부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며 "이머징시장에서 투자기회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다.
WSJ는 이머징국가 간 자본교류 확대를 구조적인 트렌드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서구는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투자를 받는 입장이었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이머징국가들이 투자자로 입장이 바뀌고 이머징 중심의 글로벌 자본시장 형성이 가속화하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위상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이들 이머징국가에서 국부펀드와 더불어 민간 투자산업이 성장하면 서구의 금융산업에도 타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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