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캔들이 된 그림<br>구매자 밝힐 의무 없고… 소유자 구분도 모호해… 상속 수단 등으로 악용
| 움직이는 고요(왼쪽) 행복한 눈물(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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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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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소유의 욕망과 예술의 '잘못된 만남'
■ 스캔들이 된 그림구매자 밝힐 의무 없고… 소유자 구분도 모호해… 상속 수단 등으로 악용
조상인기자 ccsi@sed.co.kr
움직이는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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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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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차장 시절에 전군표 당시 청장에게 시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그림을 상납했다는 주장이 불거지면서 '그림 뇌물'로 시끌벅적하다. 대형 건물 로비에 휘황찬란하게 걸린 작품이 세력가의 검은 뒷거래의 증거물로 전락해버린 사례들은 이밖에도 여러 건 있다. 뇌물 시비에 휘말린 그림들은 찬사와 애호의 대상으로서 예술품이 아닌, 씁쓸한 스캔들의 한복판에 놓인 '사건의 진원지'일 뿐이다.
◇스캔들이 된 그림
#1. 신정아와 변양균의 '큰일났다 봄이 왔다'(황규태 作)
2007년은 미술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기였던 동시에 '그림 스캔들'로 얼룩진 한 해였다. 이 해 7월 광주비엔날레 최연소 예술감독으로 발탁된 신정아 전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두고 예일대 학력이 허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조사 과정에서 신씨 배후의 권력 실세로 변양균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 확인됐다. 신씨가 동국대 조교수,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등 주요 자리를 꿰차는 과정에 변씨의 입김이 작용, 두 사람이 예술적 동지를 표방한 '부적절한 관계'였음이 드러나 '신정아 게이트'로 불리게 됐다.
변 전 실장은 기획예산처 장관이던 2005년 7월 신정아씨를 통해 작가 황규태의 사진작품 '큰일났다 봄이 왔다'를 800만원, 윤영석의 '움직이는 고요'를 1,200만원에 사들여 기획처 장관실과 회의실에 각각 걸었다. '큰일났다 봄이 왔다'는 커다란 벚나무 가지에 벗어놓은 여성의 신발과 치마가 올망졸망 걸려있는 모습의 합성 사진이다.
윤영석 작가의 4점 1세트 '움직이는 고요'는 렌티큘러(눈의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변하는 입체사진)를 이용한 설치작품으로 관람자가 걸어가면서 바라보면 수조에 담긴 농구공이 아래위로 튀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획예산처에는 3점만이 1세트로 걸려있어 신씨가 이중 1점을 빼돌려 자신의 오피스텔에 설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작가 윤씨는 "작가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돼 완성도와 가치가 훼손됐다"며 신씨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종로구 인사동 초입에 설치된 7m 높이 붓 모양의 대형 조형물 '일획을 긋다'로 유명한 작가다.
세계적인 동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존 버닝햄은 '그림책 전'을 기획한 신씨와의 인연으로 변씨의 자화상을 그려줬다. 변씨는 검찰 수사에서 신씨에게 준 4,600만원어치 선물이 이 자화상에 대한 대가라고 주장했었다. 존 버닝햄의 작품은 변씨 집무실에도 걸려있었다고 한다.
#2. 삼성 홍라희 여사의 '행복한 눈물'(로이 리히텐슈타인 作)
2007년 11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미국의 팝아트(POP ART)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행복한 눈물'은 일약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됐다. 광고와 대중매체, 대량생산의 이미지를 작품에 차용한 리히텐슈타인은 싸구려 만화 이미지를 크게 확대해 허름한 인쇄의 동그란 망점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그리는 기법을 썼다. 당시 김 변호사는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가 2002년 11월 해외 미술품 경매에서 716만 달러에 이 작품을 구입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검찰 조사 결과 '고가그림 구매 파문'은 김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결론났다.
검찰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일명 '홍여사의 작품 목록'으로 국내 컬렉터들에게 지침서로 통하면서 인기가 급증했다. 특히 '행복한 눈물'은 부유층 사모님들의 구매취향을 팝아트로 돌려놓아 국내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 값까지 끌어올렸다. 구매 당시 80억원대였던 '행복한 눈물'은 현재 추정가 200억원 정도로 평가된다.
#3. 국세청 실세들의 '학동마을'(최욱경 作) 그리고…
45세에 요절한 고 최욱경(1940~1985) 화백의 추상화 '학동마을'은 올초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차장시절 당시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상납한 뇌물이라는 의혹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서울대 회화과 출신의 작가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60~70년대 우리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난 과감한 원색의 사용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했다. '그림 상납' 파문으로 작가는 생전에 누리지 못한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붉은색 바탕에 푸른색과 녹색으로 학과 산, 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38ⅹ45.5cm의 크기지만 가격은 최소 1,000만원 이상 4,000만~5,000만원까지 추산된다. 2007년 초 당시 한상률 차장 내외는 인사 직전에 전군표 전 청장 부부를 만나 이 그림을 건넨 것으로 알려졌는데 뇌물수수 혐의로 복역 중인 전 전 청장 부인이 그림을 팔아달라며 평창동 가인갤러리에 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미술품 개인거래는 매매에 대한 비밀보장이 엄격하지만 이처럼 선물로 받은 그림은 진위나 가격 감정을 위해 소장과 전시이력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여가 지나 '학동마을'은 조용한 평창동 화랑가를 뒤흔들고 있다. 가인갤러리 대표 홍모씨가 국세청 간부인 남편 안원구 씨의 권력을 이용해 세무조사를 무마해주는 댓가로 기업들에 그림을 '강매'했다는 의혹이다. 홍씨는 90년대 청담동에서 화랑을 운영하다 8년간 미국생활 후 2005년에 평창동 옛 이응노미술관인 현재 자리로 옮겨 재개관했다. 가인갤러리는 2006년부터 S건설 아파트, S골프클럽, M화재 등 대형 건물에 공공조형물을 설치하는 '공공미술사업'도 본격 전개했다. 검찰은 화랑의 영업활동 과정에서 남편의 외압이 있었는지를 수사중이다.
◇그림로비 예로부터 성행했다
르네상스시대 최고 가문인 메디치가에 잘 보이기 위해 금융가 델 라마는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작품을 그리게 해 교회에 걸었는데 동방박사를 메디치 집안 사람들 얼굴로 묘사하게 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중국과 일본 등 동양 역시 그림 선물의 역사가 길다. 시서화(詩書畵)를 선비의 3대 덕목으로 꼽은 조선조에는 문인화를 그려 서로 주고받는 문화가 성행해 작가 서명과 별도로 '누가 누구에게 선물로 그림을 준다'는 낙관을 남기기도 했다.
근대 이후에는 그림을 주고받을 문화적 여유가 줄어든 대신 암암리에 고서화와 도자기 등이 '뇌물'로 오갔다. 한 고미술품 감정 전문가는 "80년대까지는 고서화와 도자기가 뇌물로 인기였다"며 "나중에 받은 그림이나 도자기를 팔고자 은밀히 살펴봐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는데 감정가들에 따르면 절반 이상, 많게는 80% 이상이 가짜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저명한 도자기 전문가는 "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권력자들이 받은 도자기 대부분이 가짜여서 놀랐을 정도"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왜 그림 뇌물인가
그림이 뇌물이나 비자금 은닉처로 선호되는 이유는 누구 손에서 누구 손으로 옮겨가는지 흐름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부동산처럼 작품을 일일이 등록할 수는 없다. 작품 판매자로서 법인세를 내는 화랑은 소득에 대한 신고와 이에 대한 세금만 내면 구매자를 반드시 밝힐 의무는 없다. 상속세법에 미술품에 대한 상속증여세가 명시돼 있지만 미술품은 소유자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까닭에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한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릴 수가 없다. 때문에 재벌가에서는 미술품을 상속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한다. 경매를 통해 거액의 작품을 구입한다 하더라도 10% 정도의 수수료를 내고 대행 화랑이나 대행인을 이용하는 게 다반사다.
그림은 사과박스로 전달하는 돈다발에 비해 '품격'있는 뇌물이다. 문화적 소양이 깊은 애호가들이라면 불쾌하지 않게 선물로 건넬 수도 있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종필 자민련 총재, 이후락 전 정보부장 등은 특히 서화를 좋아해 선물하겠다는 사람이 넘쳐났었다고 한다. 취향에 따라 1,000만원 짜리가 1억원 이상의 가치로 보일 수도 있는데 때로 이 점이 역이용되기도 한다. 그림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발뺌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가격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도 '매력요인'으로 꼽힌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작품들은 결코 가격이 떨어질 리 없는 유명화가이자 더 이상 생산이 불가능한 작고 화가라는 점, 수작(秀作)이라 판매 환금성이 좋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미술품은 소장자의 문화적 지위와 재산증식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그림이 재산 가치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미술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방증한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유럽에서는 고가의 미술품에 대해 소장이력을 분명히 밝히는 만큼 우리도 문제 발생을 줄이기 위해 진위 감정부터 소장가 정보까지 명시해야 한다"며 "프랑스 같은 '위촉감정사 제도'를 마련하면 공직자 윤리규정상 신고를 해야 하는 500만원 이상의 (그림)선물을 확인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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