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5월26일 새벽4시, 페르시아 남부 사막.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지표를 뚫고 치솟는 검은 액체기둥에 넋을 잃었다. 중동 지역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터진 순간이다. 원유와 가스로 질식사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실무자들은 본국에 짧은 전문을 날렸다. ‘시편 104편 15절 3행을 보시오.’ 성경에서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을…주셨도다’라는 구절을 찾은 투자자들은 감격에 젖었다. 석유개발 협정을 체결한 지 만 7년 동안 기름이 솟지 않아 파산 위기에 몰렸다 대박을 맞았기 때문이다. 막판에 투자했던 대주주가 현장에 발송한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철수하라’는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두번째 시추공에서도 원유가 솟구쳤다. 영국 정부도 반색했다.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기 위해 안정적 원유공급원을 찾던 시기, 영국은 즉각 노새 6,000마리를 동원해 사막을 가로지는 222㎞의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아바단의 현대식 항구와 정유공장도 이때 들어섰다. 정작 유전의 임자인 페르시아(이란)는 개발에 참여하지도, 과실을 누리지도 못했다. 매년 순익의 16% 정도만 왕족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자기 권리를 본격 주장한 것은 1956년.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익배분협정 갱신과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자 영국은 미국과 손잡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민선정부를 전복시켰다. 팔레비 국왕이 정권을 잡은 것도 당시 미ㆍ영의 합동정치 공작인 ‘아작스 작전’의 결과물이다. 막대한 지하자원에도 이란의 고난은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눈 밖에 난 탓이다. 세계 원유 매장량의 65%, 생산의 29%를 차지하는 중동이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란의 역사가 대신 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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