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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도 1개월, 길게는 2~3년 한 작품을 쓰면서 소설가들은 '겹'의 삶을 삽니다. 책 속 주인공 정도전은 1392년인데, 전 2014년 서울의 김탁환이죠. 그 시대의 호흡, 시간, 감각 속에 있다가 현재로 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듯 하나의 마찰이 생깁니다. 그 시간차, 바로 '틈'이 주는 긴장감을 체험하고 중첩된 삶을 사는 게 장편작가의 운명 아닐까요."
소설가 김탁환(46·사진)이 최근 서울 양재동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에서 진행한 한 강의에서 창작의 고충에 대해 이같이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 2월 장편소설 '혁명 -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통해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의 이야기를 펴냈다. 그것도 개국 직전 정몽주가 죽기까지 긴박했던 18일간을 정도전의 호흡으로 풀어낸다.
"전 '접신'이라고 하는데, (주인공과의) 틈을 좁히다 어느 순간 딱 붙는 순간이죠. 독자들은 소설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고 묻지만, 모든 대화는 제가 씁니다. 문헌을 그대로 가져오는 건 2~3% 정도, 나머지는 접신된 상태로 씁니다. 힘이 드는 작업이라 하루 30매 이상 쓰지 않습니다. 느낌 온다고 100매씩 쓰면 탈이 나죠. 하루 잘 쓰고 못 쓰는 것보다, 똑같은 시간대로 계속 달리는 게 중요한 '마라톤'입니다."
주인공에 몰입하는 일이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는 '그 이상' 어렵다고 말했다. "배우는 한 배역의 연기만 하지만 소설가는 모든 배우 역할에 감독까지 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쓸 때 주요 배역만 108명, 1인 108역인거죠.게다가 주요 장면에 조명·음향을 넣는 것도 제 몫이죠. 소설쓰기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일입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과는 단순하다. "아침엔 글 쓰고 오후엔 마음대로 놀고 저녁엔 책을 봅니다. 소설 들여다보는 것만도 골치아픈데 밖에서까지 복잡하면 안돼요.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 장편 작가들은 다 비슷하죠."
그렇게 장기간 한 인물에 몰입하지만, 작품이 끝나면 빠른 시간 내에 털어낸다. 그 방법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헤밍웨이에게는 여자였다지만, 그에게는 여행이다. "장편 작가들의 평전을 보면 작품과 작품 사이 '쎈' 짓을 합니다. 여자든, 도박이든. 전 제주도에서 경치 좋은 곳 어디든 다니며 망각여행을 하고 술을 좀 많이 마시죠. 그렇게 돌아오면 다 잊어버립니다. 독자 간담회 때 구체적인 구절을 들며 물을 때가 가장 난감합니다.(웃음) 트위터에서 좋은 글을 보고 무심코 저장했는데 제 글일 때도 있습니다."
사실 그가 오래 마음에 둔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벌써 10여년째 공부 중. "쓰고 싶다고 바로 되는 건 아닙니다. 공부하고 탐색하면서 틈을 계속 좁히다보면 어느 순간 넘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듭니다. '나 황진이'를 쓸 때는 여자, 그것도 기생으로 넘어가기가 힘들었죠. 아내와 딸들 보면 바로 남자로 돌아오니, 6개월여 집을 안들어가고 썼을 정도입니다. 세종대왕은 한 5~6년 지나 50대 중반이면 되려나 봅니다. 정도전도 7년 전부터 별렀죠. " @sed.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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