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계에서 은행장은 참 외롭고도 힘든 자리다. 거센 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외부에서 오는 갖은 압력과 회유에 시달려야 한다. 굳이 비유하면 최고경영자(CEO)와 정치인의 중간쯤 된다고 봐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다.
하영구(60ㆍ사진) 한국씨티은행장은 국내 은행에서 가장 오래된 CEO다. 지난 2001년 1월 한미은행장에 취임해 한미가 씨티그룹에 인수돼 한국씨티로 간판을 바꿔 단 후에도 12년 동안 사령탑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하 행장은 '최장수 은행장'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손사래부터 친다.
"금융권 최장수 CEO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부담감이 크죠. 그냥 물 흘러가듯이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온 날들이 모여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안겨준 셈이에요. 지금도 마음가짐은 일반 행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오랜 기간 하 행장이 한결같이 한국씨티의 최선봉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경영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씨티는 지난해 유럽발 재정위기 및 국내 경기 침체 등 대내외 경기불안 요인에도 불구, 4,56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전년동기 대비 44.7%나 증가한 수치로 국내 시중은행들 중 가장 알토란 같은 수익을 올렸다. 당연히 하 행장의 다부진 경영능력과 리더십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성과다.
이 때문일까. 하 행장은 국내 금융계에서 '모범생'이미지가 강하다. 수년 동안 고수하고 있는 칼에 베일 듯이 반듯한 헤어스타일부터 경영자로서 지난 10여년 동안 크고 작은 스캔들 없이 승승장구하는 그의 행적이 그렇다.
국내 금융계의 주요 자리가 빌 때마다 심심찮게 하 행장의 이름이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정작 하 행장은 모범생 이미지가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중ㆍ고등학교 학창 시절 저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교실에서는 딱히 눈에 띄지 않고 방과 후에 급우들과 축구공을 차며 학교 운동장을 누비는 학생이었어요."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집안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사업가가 되겠다'며 청운의 꿈을 안고 1972년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던 20세의 하 행장. 그 당시 그에게서는 투사의 이미지가 투영된다.
특히 하 행장이 대학교 1학년이 됐던 해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 권력을 위한 제도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초법적인 유신헌법을 제정, 정국이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세상일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하 행장은 학생운동과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는 당시 안기부의 블랙리스트에까지 이름이 오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당연히 학점 관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상대 게시판에는 다른 학사 경고자들과 나란히 하 행장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가 1976년 학교를 졸업한 직후 MBA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노스웨스턴대로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하 행장은 3명의 보증인을 세운 뒤에야 간신히 당국으로부터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 행장은 당시 신원 보증을 서준 이도선ㆍ이현재ㆍ김보현 전 국회의원들을 오늘날 그를 있게 해준 평생의 은인으로 꼽고 있다.
하 행장은 미국에서 MBA과정을 밟으며 금융산업의 가능성에 대해서 눈을 떴다. 국내에서는 당시만 해도 은행 서비스가 기업금융에만 치중했던 시절이었다.
귀국 후 하 행장은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입행해 32년 은행원의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이제는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씨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은행이 대내외적으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정공법으로 위기를 극복했던 그의 승부사 기질은 행원 시절부터 싹을 키워왔다.
하 행장이 은행에서 수석 딜러로 근무하던 시절 당시 국내 금융시장에서 개인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시장의 내실 있는 성장을 위해서는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활성화가 관건이었다. 이때 하 행장은 시중은행에서도 투자 상품 판매를 확대한다면 기관투자가들을 충분히 금융시장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 행장은 "당시 국내 증권사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었는데 신뢰할 수 있는 금융기관인 은행에서 투자 상품을 취급한다면 보수적인 기관투자가들도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대만이나 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금융당국 관계자들을 설득해 결국은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 직원들이 참가하는 친선 축구대회에서도 하 행장의 악바리 같은 승부사 기질이 발휘됐다. 한국씨티는 하 행장을 최전방 공격수로 내세워 단 1회를 제외하고 10여년 가까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최근에도 하 행장의 승부사적 기질은 곳곳에서 발휘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시중은행 중에서는 처음으로 퇴직연금 시장에서 손을 떼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하기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의도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더 힘듭니다. 하지만 은행의 중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한다면 과감하게 선택과 집중에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승부사의 이미지이지만 하 행장 스스로는 물론 행 내에서 그는 자상한 아버지에 가까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한미은행과 합병 후 2007년 통합법인이 첫 임원감축을 단행하던 당시 하 행장은 회사를 떠나는 130여명의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구를 전달하며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을 에둘러 표했다고 한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러 보며'
특히 행 내에서 하 행장은 여자 행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 행장이 행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철학은 '일과 직장생활의 조화'이다. 특히 가정을 가진 '워킹맘'들을 위한 일종의 배려인데 실제 씨티는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금요일은 자기계발의 날로 정해 정시퇴근을 권장하고 있다. 아울러 탄력적 근무시간, 재택근무제도 등 다양한 근무 형태가 가능하다.
자율근무 형태는 육아와 가사를 부담하는 여성 행원들에게 큰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자율근무를 선택한 행원 중 여직원 비율이 65%를 상회하고 있다.
이러한 회사 분위기 덕분에 한국씨티 직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인력 중 기혼여성 비율은 무려 60%가 넘는다.
하 행장은 "제가 딸 셋을 둔 딸 부자 아빠입니다. 거기다 부인까지, 집에서는 철저하게 여성 상위시대입니다(웃음). 이런 가족관계 때문인지 여성의 사회 참여를 권장하고 보장할 수 있는 기업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원 인생 32년차. 하 행장은 이제 제2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들이 길어졌다고 한다.
"과거 씨티그룹의 회장을 맡았던 빌 로즈 전 회장은 씨티그룹에만 50년 동안 몸을 담았습니다. 그 분에 비하면 저의 이력은 아직까지 크게 부족하지만 30년 동안 씨티맨으로 살면서 느꼈던 만족감과 보람은 제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씨티로부터 누렸던 많은 행복을 사회에 나눠주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굳이 금융계에 몸담고 있지 않더라도 사회에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 인생 2막을 여는 새로운 목표입니다."
●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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