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한국 최초의 자동차 CM(commercial)송의 가사 일부다. 때는 1950년대 후반, 한국일보가 운영하는 최초의 민간 TV방송 HLKZ-TV는 ‘시발’로 시작되는 광고전파를 내보냈다. TV 수상기는 극소수 부유층 외에는 없던 시절이지만 방송국 옥외 스피커가 있던 서울 종로 부근의 아이들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부모들은 질색하고 말렸다고 한다. ‘노래가 아니라 욕하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의 저서 ‘고종, 캐딜락을 타다 - 한국 자동차 110년의 이야기’에서 부분 발췌)
‘시발’은 발음이 욕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처음 만든 자동차의 이름. 1955년10월12일 상표를 등록하며 ‘ㅅㅣ-ㅂㅏㄹ’이라고 신고했다. 첫출발이라는 뜻의 한자어 시발(始發)을 한글 자모로 옮긴 것이다. 제원은 배기량 2,195㏄에 최고 속도 시속 80㎞. 요즘의 중형승용차보다 큰 출력의 엔진을 달고도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비포장 도로에서는 유리창이 깨져 나갔다. 고장도 잦았다. 그럴 만 했다. 기술과 자본의 축적이 거의 없는 시대에 열정과 가능성만 믿고 제작한 ‘국산 자동차’였으니까.
시발 자동차가 처음 완성된 1955년 8월 무렵 국내 자동차 시장은 주한 미군이 얼마나 폐차하느냐에 울고 웃었다. 미군이 버린 폐차에서 주요 부품을 떼어 내 재생하고 드럼통을 펴서 겉을 입힌 개조차들이 굴러다녔다. 대부분 공장도 없이 천막에서 미군 지프와 군용트럭을 재생해 지프형 승용차와 버스를 만들어냈다. 시발 자동차 역시 외형은 미군 지프를 그대로 베꼈지만 내용은 달랐다. *
무엇보다 국산 엔진을 달았다. 첫 국산 엔진과 국산차를 선보인 곳은 신문기자 출신인 최무성씨가 동생 둘과 설립한 국제공업사. 자동차 정비 및 개조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국제공업사는 ‘엔진 도사 김영삼’을 스카우트한 뒤부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국산 엔진 제작이 꿈이었던 기술자 김영삼은 사장을 설득해 엔진을 만들어냈다. 흙으로 만든 틀에 쇳물을 부어 주물을 제작한 다음 손으로 구멍을 뚫고 깎아내는 광경을 지켜본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인들의 신기로운 손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온갖 어려움 속에 세상에 태어난 시발 자동차는 초년 운이 좋았다.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궁(당시는 창경원)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경영진과 기술진을 초청해 격려하고 시발자동차를 시승까지 했다는 소식에 ‘사겠다’는 주문이 줄이었다. 대당 8만환 하던 차량 가격에 24만환의 프리미엄까지 붙고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 차량 구입을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차량 인수자격을 미리 달라는 선금도 1억환이나 쌓였다. 제작사는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지만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천막공장의 최대 생산량이 하루 한 대 꼴이었으니까. 쏟아지는 주문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던 국제공업사는 원효로에 공장다운 공장을 차렸다.(현대자동차 원효로 서비스 센터의 일부가 바로 국제공업사가 마련했던 공장 부지다)
시설 투자를 늘린 시발 자동차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발동한 ‘5.8 대책’에 발목이 잡혔다. 주한 미군이 별다른 제한 없이 주던 휘발유 공급을 제한하자 급해진 정부는 기존의 차를 폐차시켜야 새로운 차를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타격이었지만 낡은 차의 교체 수요가 워낙 커 시발 자동차는 차츰 성장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시발 자동차의 앞길을 막은 것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 아래 일어난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일제 승용차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국산차의 활로를 차단한 사건. ‘자동차 공업육성법’을 제정하고는 법의 이름과 정반대의 시책을 펼친 것이다. 말이 조립생산이지 일본 닛산의 완성차 ‘블루버드’를 들여와 이름만 바꾼 ‘새나라’ 자동차의 성능은 시발과 비할 게 아니었다. 정치헌금설이 도는 가운데 정권의 비호를 받는 양질의 수입품에 시발자동차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국산품 애용’을 외쳤던 박정희 정권은 최초의 국산차를 만든 국제공업사 최무성 사장 주변을 세무조사로 뒤졌다.
시발 자동차의 후속 모델을 제작하기 위해 국제공업사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던 오원철(3공 시절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비서관 역임)씨는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 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시발 자동차가 상표 등록을 한지 6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게 변했다. 3만대 남짓하던 전국의 자동차는 2,246만대에 이른다. 한국은 세계에서 15번째로 2천만대선을 넘은 나라다. 세계를 기준으로 하는 기록은 더 있다. 자동차 수출은 독일·일본·미국·캐나다에 이어 세계 5위. 영국과 프랑스를 제쳤다. 자동차 부문의 무역수지 흑자규모로는 세계 4위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성과 기술 수준은? 장담하기 쉽지 않다. 국산 기술을 외면한 대가를 언젠가는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확언할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지금 우리는 국산 기술 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시발 자동차가 과연 최초의 국산차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다만 최초의 국산차로 인정하는 게 주류다. 1958년 정부에 제출된 자료에는 국산화율이 58%로 표기돼 있다. 시발자동차 공장장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제2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씨도 핵심부품을 점진적으로 국산화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혹평도 존재한다. 엔진과 주요 부품을 미군이 폐기한 지프에서 떼어내고 드럼통을 두들겨 펴서 만든 차량이라는 것이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국산차로서 시발 자동차의 의미를 애써 부정하는 데에는 박 정권의 새나라 자동차 사건으로 한국의 독자적인 자동차 기술 확보와 발전이 타격받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엿보인다. 시발 자동차의 CM송 가사는 당시에도 복합적인 의미로 불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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