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더불어민주당 등 4당이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원칙적으로는 합의했지만 국회 재적의원 5분의3(180석) 이상이 동의하면 본회의에 바로 법안을 올릴 수 있는 안건신속처리제(패스트 트랙) 등 핵심 조항 개정에는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차기 정부가 국정 운영상 발목이 잡히는 일을 줄이기 위해 쟁점 법안 의결 정족수 ‘5분의3’을 과반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규정 개정 찬성 측은 현재 정당 간 대결구도에서 비현실적인 5분의3 규정을 고쳐 안건신속처리제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 측은 5분의3 가중다수결이 소수의견도 존중하는 의사결정 방식이며 과반으로 바꿀 경우 다시 폭력 국회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국회선진화법은 선의(善意)다. ‘동물 국회’ 대신 토론과 대화, 그리고 타협의 국회다. 긍정적 효과도 있다. 예산안의 헌법상 의결 기한 내 처리다. 11월30일까지 예산안 및 세입예산안 부수법안의 심사를 마치지 못했을 경우 12월1일 본회의에 예산안이 자동 부의된다. 미상정 법안 수가 줄고 기간이 단축된 것과 함께 국회선진화법이 실질적으로 기능한 부분이다. 그렇다고 국회의 예산안 심사가 적절하고 알차게 진행됐다는 것은 아니다. 법정 기한은 지켰지만 예산 심사의 무력화와 부실화 위험성도 높아졌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입법 교착 상태에 빠진 경우도 없었다. 5분의3 찬성의 가중의결 정족수를 요구하는 안건신속처리제나 법사위 체계자구심사 지연법안의 본회의 부의제가 시행된 적이 없었다. 3분의2 의결을 규정한 여야 동수의 상임위 안건조정위원회 상정안건 처리도 없었다.
국회의 입법 교착은 국회 운영원리와 의사결정 방식의 대립과 긴장이다. 국회는 운영원리로서 합의제 또는 협의제를 지향한다. 국회법에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와 협의 등에 의해 국회 의사 일정과 안건 등을 처리하도록 규정돼 있다. 국회 개원도 협상의 대상이다. 동시에 국회는 의사결정 방식으로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여기에 국회선진화법 이후 국회의장과 원내교섭단체 대의 간 협의에 따라 국회 의사 일정과 절차를 결정하도록 하는 사항이 더 많아졌다.
문제는 입법 교착 상태가 계속될 때 이를 돌파할 수 없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입법 교착 상태 때 가장 흔히 사용된 방식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었다. 여야의 물리적 충돌은 대부분 이 지점이다. 직권상정과 다수당의 단독 또는 강행 처리가 가장 많았던 18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이 ‘몸싸움 방지법’으로도 불린 이유다. 폭력 국회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 국회선진화법이다.
하지만 ‘식물 국회’가 나타났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책 수립과 변경은 입법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입법 타이밍을 놓치면 정책 시행이 늦어지고 기대했던 정책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피해자는 국민이다. 2014년 4개월여 동안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표류한 기초연금법 개정안도 그렇다. 기초연금법처럼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거나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안건일수록 입법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렇다고 기초연금법 개정안을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처리하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개정안에 대해 당파성에서 벗어나 상당수 야당의원이 여당 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5분의3’ 의결 정족수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회선진화법의 가장 큰 문제는 안건신속처리제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신속처리 대상으로 지정된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까지 최대 330일이 소요되는데 18대 국회에서 제출된 법안이 최종 처리되기까지 걸린 평균 기간이 282일이던 것을 보면 ‘신속처리’가 아니다.
따라서 신속처리 안건의 지정 요건을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바꿔야 한다. 안건신속처리제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 강화를 반대의 측면에서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것인데도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하기 위해 국회의원 60%의 찬성을 규정해 신속처리제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국회선진화법은 여야 간 자유 교차투표가 가능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어느 정당도 단독으로 국회 의석의 5분의3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야 간 타협과 절충, 그리고 안건의 신속처리가 가능하려면 교차투표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불가능하다. 강한 정당 기율과 높은 정당 응집성, 그리고 정당 간 대결적 관계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집단주의 완화와 의원 자율성의 제고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어서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
첫째, 국회의장의 정치적 역할 확대다. 우선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를 요청하고 합의가 어려울 때 다시 합의를 요청하는 것은 물론 중재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확보하며 의장의 의사정리진행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제한적으로라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권을 확대해 의장의 합의 요청과 중재안의 무게감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여야 간 합의를 우선하되 합의가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형태로든 적시(適時)의 입법 결정이 가능하도록 국회의장이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입법부 수장의 임기와 선출 방식 등도 개선돼야 한다.
둘째, 다수결에 대한 국민적 공감 확대와 국회 실천이다. 국회선진화법은 무기명 투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여야 모두 당론 구속을 최소화하면서 의원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하며 당장 여야의 정체성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법안을 중심으로 자유 투표를 시행하고 장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당 조직원으로서의 의원과 헌법기관이자 대표로서의 의원의 역할 조화다.
셋째, 미국 의회에서 사용하는 비(非)쟁점 법안 별도 분리 처리제를 도입해야 한다. 여야가 합의했고 관련 절차까지 모두 마친 법안들이 여야의 내외부적 요인 때문에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도 했다. 정쟁은 정쟁대로 진행하되 비쟁점 법안은 정쟁과 무관하게 처리돼야 한다. 5분의3 의결 정족수는 비현실적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