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배였던 김현옥은 1966년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종묘에서 남산자락의 필동에 이르는 폭 50m, 길이 1㎞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이곳에 주상복합군(群)을 짓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래 이 일대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연합군의 도쿄 대공습에 충격을 받은 일본이 ‘소개공지(疏開空地)’로 조성했던 땅이다.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른바 ‘나비작전’으로 불린 철거작업을 단 두 달 만에 끝낸 그는 그해 9월 기공식에서 주상복합군에 ‘세상의 기운(世運)이 모두 모인다’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1967년 가장 북쪽의 현대상가 준공을 시작으로 청계·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상가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들어선 7개 건물을 ‘세운상가’라고 통칭하게 된 사연이다.
세운상가는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의 상징이었다. 상가 내부에 들어선 소규모 전자제품과 부품점들은 군사정권의 공업입국정책을 등에 업고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 말에는 전국 전자제품 유통의 70%가 이곳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상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미사일·탱크는 물론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다.
하지만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조성되고 기업들의 강남 이전이 본격화하면서 세운상가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오락기 등의 불법복제에 대한 단속이 시작된 것도 전자업체들이 세운상가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결국 2008년 서울시의 공원화 계획에 따라 현대상가가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세운상가는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인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전환기를 맞았다. 이는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한 뒤 스타트업을 유치해 4차 산업혁명의 메카로 육성하겠다는 프로젝트다. 19일에는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에서 철거됐던 세운상가(옛 현대상가)와 청계·대림상가 간 공중보행교가 다시 연결되는 결실을 보기도 했다. 이 보행로를 따라 젊은 창업인재들의 발길이 이어져 세운상가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상징하는 메카로 부활하기를 기대해본다.
/정두환 논설위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