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모시 적삼 위에 올올이 추억을 새기듯 매화꽃을 그렸다. 뽀얗던 한산모시가 노릇하게 바랜 빛이 꼭 흙색 같아 꽃이 더 잘 어울린다.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꽃말과 계절을 갖고 있지만, 사람 손에 쥐어진 꽃은 또 다른 각자의 사연과 감정을 담게 된다. 곱게 피어오른 꽃에서 기분 좋은 날의 기억, 계절의 추억이 있고 반가운 손님과 친구가 스쳐간다. 만개한 꽃의 뒷모습에서는 꾹 참고 견뎌온 어떤 이의 빳빳한 목덜미가 보이고, 싱그러운 월계수는 졸업하던 날 아들의 장한 얼굴을 되새긴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20여 년 간 현지에서 생활하며 작업해 온 서양화가 이경희의 국내 첫 개인전 ‘번역된 기억’이 21일까지 서울 마포구 인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991년 경희대를 졸업하고 이내 이탈리아로 간 그녀의 한결같은 그림 주제는 꽃이었다. 다만 소재가 탐탁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친의 유품인 모시저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삼베와 모시를 모조리 가져갔고 이번 전시작들을 완성했다. 천에 풀 먹이는 것에서 착안해 수채화물감과 아크릴 풀을 섞은 안료로 꽃을 그렸고 다림질로 색이 착 달라붙게 했다. 천 가장자리는 오색 명주실로 박음질하고, 이따금씩 화폭 중앙에 수를 놓거나 색실을 채우기도 했다. 지난한 과정 속에 꽃과 관련된 기억은 퇴적층처럼 다져졌다. 하늘거리는 모시 위 꽃 그림은 ‘화사한 화석’이 됐다. 예쁘게 핀 꽃뿐만 아니라 살짝 시든 잎과 줄기까지 공존해도 더없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그게 삶이니까.
서양화의 오랜 도구인 빽빽하고 반듯한 캔버스가 아닌, 성글고 주름진 삼베라 그런지 꽃 사이로 바람이 분다. 흙 떠난 꽃에게 뿌리내릴 틈을 준 듯하다. 이 작가의 남편은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에 이름을 알린 조각가 박은선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야외전시장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박은선의 작품은 색색의 대리석을 교차시켜 쌓고 그 틈을 의도적으로 벌려 ‘숨통’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남편은 숨통을, 아내는 살 틈을 작품에서 구현하니 부창부수다.
이경희 작가는 “새로운 도시를 다닐 때마다 내 눈에는 꽃들이 먼저 들어왔고 힘든 시간을 견디는 친구가 됐다”면서 “한국 고유의 삼베와 모시를 캔버스 삼아 독자적은 꽃그림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카라라아카데미아에서 무대장식과를 다녔고 아들 둘을 낳은 뒤 서양화과로 재입학해 졸업했다. 내년에는 휴양도시 포르테 데이 마르미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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