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학자인 카를 만하임은 1928년 발표된 ‘세대의 문제’ 라는 논문에서 사회변화의 추동력으로서 ‘세대’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세대는 단순히 동시대에 태어난 생물학적 연령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대는 어떤 제한된 환경에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한 연령집단을 일컫는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의 공유과정에서 기존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인식을 달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그는 ‘새로운 접촉’으로 표현했다. 즉 젊은 세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반추’하면서 새로운 인식을 확보하는 단초, 이를 통해 젊은 세대가 사회변화를 추구하게 되는 결정적 전기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한 경험 등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접촉’에서 찾은 것이다.
이러한 만하임의 분석은 기존 한국 정치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요사이 언론에 빈번히 등장하는 86세대의 경우 대학가에서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과 전횡을 목격하면서 고유한 세대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의 죽음 등 충격적인 현실을 경험하면서 권위주의의 종식을 위한 무한투쟁이 86세대의 뇌리에 깊이 박힌 행동철학이 됐다. 당시 대학가의 일상이었던 최루탄 냄새 속에 등교해 캠퍼스의 전투경찰을 보면서 압제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체득됐다. 80년대 학번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하나의 연령집단을 넘어서서 뚜렷이 구분되는 정체성을 지닌 만하임적 의미의 세대 조건을 충족했다.
86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충격적 사건을 접하면서 형성된 세대는 일반 연령집단과 달리, 나이가 들어도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대 다른 집단과 구별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과거의 인식 틀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사회 중견세력이 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과거에는 순기능적이었던 그 세대의 사고방식이 현재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 86세대의 경우 여전히 세상을 적과 동지의 이항 대립적 관계로 보는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 무척 답답할 때가 있다. 난세를 헤쳐나가야 하는 국가적 과제는 미래까지 통찰하는 입체적 사고를 요구하고 그 해법은 여야 간 중층적인 정책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정치권 86세대는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순간에 다다르면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사고방식을 곧잘 드러낸다. 이러한 일도양단식 생각은 심각한 문제다.
86세대의 이러한 경향과 달리 주목할 만한 현상은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과정에서 ‘공정성’ 문제가 부각되면서, 20대가 만하임적 의미에서 새로운 세대로 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2030 연령집단을 진보, 6070 연령집단을 보수, 상황에 따라 4050 연령집단을 끼인 세대로 보는 관점이 우세했고 이 가운데 20대는 진보의 핵심지지층으로 인식돼왔다.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가 조 장관 인사청문회 과정을 지켜보면서 진보진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상당수가 무당파 유권자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는 조 장관 임명을 둘러싼 불편함과 부조리가 새로운 종류의 충격이자 기존 정치권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변하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접촉’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20대가 피부로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민주화 쟁취, 구악이나 적폐 청산처럼 어느 한쪽이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승패의 논리와는 사뭇 다르다. 공정성의 논리는 누가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든지 그 과정과 절차가 투명하고 수긍이 가는 기준에 따라서 한다는 것, 그리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정성은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세력도 독점할 수 없는 가치다. 공정성은 86세대가 주장하는 민주화나 적폐청산처럼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희소한 자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보통사람들의 서글픈 염원과 맞닿아 있어 세대를 망라해 충분히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 공정성이라는 가치로 젊은 세대가 변화의 촉진자가 돼 만들어내는, 오래 걸리겠지만 진중한 ‘조용한 혁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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