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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대참사로 끝난 '대약진운동'

1957년 빨치산식 경제개발

대약진운동 당시 지방으로 보내지는 공무원들. /위키피디아




‘전 인민이 ‘40조 강요’를 익혀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데 매진하자(發動全民,討論四十條綱要,蹶起農業生産的新高潮).’ 1957년 11월13일자 중국 인민일보에 실린 사론(社論·사설) 제목이다. 40조 강요란 1956년 마련된 농업발전 목표로 1967년까지 식량 생산을 평균 250% 증산한다는 게 골자. 당초 17개조에서 40개조로 늘어났다. 20일 뒤 열린 중국노동조합대표회의에서 류사오치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15년 뒤 철강과 공업 제품 생산에서 영국을 뛰어넘자.’

마오쩌둥 주석은 인민일보 사설과 류사오치의 언급을 구체화해 이듬해 5월 전인대에서 ‘대약진(大躍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초기에는 모든 게 가능해 보였다. 대약진운동 원년인 1958년 알곡 생산은 처음으로 2억톤을 넘어섰다. 당 지도부는 이즈음 북한에 주둔하던 중공군 25만명도 노동력 확충을 위해 빼냈다. 특히 집단화를 통해 3년 내 5억톤까지 증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역마다 세워진 집단 농장 겸 농공 병행 회사인 인민공사에 소집된 농민들은 경작지를 개간하고 댐 건설 등 대규모 수리 공사에 나섰다. 인민공사는 생활까지 통제해 농민들은 무료 급식소에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다.



가사 노동에서 벗어난 농민들은 무쇠솥을 원시적 용광로에 넣었다. 중공 당국은 영국과 맞먹는 연산 1,070만톤의 철강을 생산했다고 떠벌렸으나 제강공정(탄소 및 불순물 제거)을 거치지 않아 깨지기 쉬운 무쇠(선철)가 돼 쓸모가 없었다. 중앙에서 지시한 대로 전 인민이 동원돼 ‘곡식을 훔쳐가는 참새’의 씨를 말리는 통에 병충해가 들끓고 비가 오면 실적을 올리려 부실 공사로 지은 소규모 댐이 무너졌다. 결국 1960년 수확량은 1억4,800만톤으로 떨어졌다. 기근은 4,000만명 이상 아사(餓死)라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대약진의 실패는 책임 논란과 지도부의 노선 투쟁과 문화혁명의 광풍을 거쳐 중국의 개혁과 개방이라는 전환점에 다다랐다. 대약진의 목표는 1992년에서야 겨우 이뤘다. 서방에서는 대약진과 문화혁명을 퇴행으로 보지만 중국에는 변증법적 절차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근대화 이후 누적된 모순이 동시에 폭발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성격 논란보다 주목할 대목은 대외정책의 변화다. 대약진운동 내내 중국은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 위기를 고조시켰다. 대만의 섬들을 포격하고 나중에는 인도와도 전쟁을 치렀다. 불안하거나 욕심 많은 강자의 선택은 늘 비슷하다. 긴장과 전쟁.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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