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PEF)가 그룹 전체를 통째로 인수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최근 국내 한 PEF 운용사 대표를 만나 구조조정설(說)이 오르내리는 국내 한 대기업그룹 계열사에 대한 매각 전망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올 하반기부터 지난 1997년 IMF 사태 이후 가장 큰 ‘빅딜’의 판이 펼쳐질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였다. 삼성·현대차·SK·LG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대기업들이 10년 내 이름도 생소한 PEF로 간판을 바꿔 달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크게 나눠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선 투자자금이 넘쳐흐르고 있다. 현재 국내 PEF들이 보유한 출자약정액은 약 88조5,000억원으로 현대자동차 시가총액(20조2,000억원)의 4배에 달한다.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이런 대기자금 약 1조5,000억달러(약 1,860조원)가 우리 기업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저금리에 갈 곳을 잃은 투자자금이 고수익을 주는 대체투자 운용사로 몰린 탓이다.
기업들의 체력이 약해진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당장 올 2·4분기부터 주요 기업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0% 이상 떨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시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반도체·자동차·화학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사업에서 항공·여행·유통업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업종이 성장이 아니라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기업을 바라보는 인식도 달라졌다. 실제로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를 두고 ‘광장에 억지로 끌려 나온 지주(地主)의 자아비판’을 보는 것 같았다며 착잡한 심정을 내비친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 이른바 재벌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진단한 사람이 더 많았다. 오너의 지배력과 카리스마가 더 이상 기업 운영의 핵심요소가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 본인도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업 생태계의 조연 역할에 만족해온 PEF가 이제 주연으로 등장할 3박자가 갖춰진 셈이다.
문제는 PEF의 위기관리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진그룹 인수를 목전에 두고 사사건건 경영에 간섭하던 강성부펀드(KCGI)는 막상 생존위기가 닥치자 소방수 역할을 오너인 조원태 회장에게 미뤄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다. 펀드에 돈을 댄 출자자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펀드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기껏해야 5~6년을 보고 투자하는 펀드가 기업의 10~20년짜리 장기투자를 결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PEF 주연 경제 드라마를 10년 동안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의 심정이 조마조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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