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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군수능력이 가른 비메이로전투

1808년, 나폴레옹 몰락 전주곡

비메이로 전투에서 격돌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기병. 군수능력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 이 전투는 나폴레옹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위키피디아




1808년 8월21일 포르투갈 리스본 인근 소읍 비메이로(Vimeiro). 영국군 1만4,000여명과 프랑스군 1만3,000여명이 맞섰다. 전투 시작 전 포르투갈 민병대 5,000명이 합세하며 영국의 군세는 더욱 불어났다. 옅은 먹구름이 낀 아침 9시 프랑스군이 대포 포격에 이어 특유의 보병 40열 종대를 언덕을 향해 내보냈다. 세 군데 방향에서 벌어진 싸움의 승패는 정오 무렵 확연하게 갈렸다. 아서 웰링턴(당시 39세)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군의 압승.

영국군(사상자 720명)보다 3배의 인명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은 급히 달아났다. 웰링턴은 끝까지 추격해 전멸시킬 작정이었으나 증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선배 장군들의 중지 명령에 막혔다. 프랑스군은 ‘명예로운 철수’를 조건으로 항복 교섭에 나섰다. 영국군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프랑스군은 대포와 소총·탄약 등 모든 무기를 소지한 채 그동안 약탈했던 전리품까지 챙겨 영국이 제공하는 수송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국 정부는 ‘빛나는 전공을 허물어버린 얼빠진 협상’이라고 분노하며 지휘부를 불러들였다. 결국 무죄로 판결을 받았지만 장군들은 사실상 징계를 받았다. 끝까지 반대하며 항복수락 문서 서명을 거부했던 웰링턴만 빼고 한직으로 물러났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이래 영국과 프랑스 간 최초의 본격적인 지상전인 비메이로 전투는 두 사람의 명암을 갈랐다. 비메이로 전투에서 존재를 알린 웰링턴은 포르투갈·스페인에서 연전연승하고 워털루 전투까지 승리로 이끌어 오랜 전쟁을 끝냈다. 전후 영국 총리에도 올랐다.



반면 나폴레옹은 수렁에 빠졌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한때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했으나 고비 때마다 발목을 잡혔다. 오죽하면 ‘이베리아의 종양이 나를 괴롭힌다’고 말했을까. 프랑스는 화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경제력이 약해 보급을 ‘현지 조달’로 해결한 탓이다. 약탈하지 않으면 굶는 군대에 맞서 식량을 뺏기면 가족이 아사할 수밖에 없는 민중은 총을 들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반도전쟁을 ‘무장한 인민의 침략군에 대한 저항, 즉 인민전쟁의 시초’라고 봤다.

반면 영국은 군수체계가 남달랐다. 웰링턴이 비메이로 전투에 앞서 2개 여단을 상륙시킬 때 소요된 시일이 무려 8일. 영국군은 물론 포르투갈 저항군까지 무장시키고 먹일 보급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는 2,400여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약탈한 자본이 아니라 축적한 자본의 힘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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