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은 경북의 끝단으로 경남 밀양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청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등연지의 연꽃과 겨울 별미 미나리 삼겹살인데 지금 같은 가을은 두 가지 명물 모두 제철에서 비켜나 있다. 그나마 청도반시로 유명한 감들만 제철을 앞두고 저마다 가지에 매달려 주황색 빛깔을 뽐낸다. 서울에서 청도까지는 먼 길이어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면 점심이 훨씬 지나 도착하게 마련이다. 다른 일 때문에 이곳저곳 들렀던 터라 해 질 녘이 돼서야 청도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카메라만 든 채 밖으로 향했다.
잠자리에 들기도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청도천 둑길로 나섰다.
오가는 계절은 어쩔 수 없는지 몇 해 전 여름 찾았을 때 등줄기로 흘러내리던 땀 대신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청도천은 청도군 각북면 금천리에서 발원해 청도읍 유호리 밀양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으로, 분지로 이뤄진 이 지방 농사의 젖줄이 되고 있다. 얼굴로 들러붙는 날파리 떼를 손으로 쫓으며 둑길을 따라 배회하다 낮에 찾았던 청도읍성으로 다시 가보니 성곽 담벼락을 따라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안내문에는 “청도읍성은 지난 1995년 경상북도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축조된 시기는 고려 때이며 읍성은 청도군의 중심인 화양읍에 축조된 남고북저의 석축성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구릉 위에 있다. 청도읍성은 평산성으로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아졌으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돼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런 청도읍성은 전국의 읍성 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둘레 1,800m에 높이는 1.6m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은 조밀하고 아름다운 편이다. 읍성 성곽은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 쌓은 것으로 화양읍 서상리, 동상리, 교촌리를 둘러싸고 있던 것을 고을 수령 김은휘가 1590년(선조23) 중수해 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25)까지 석축형으로 보강하고 높이를 더 올린 것이다.
그러나 왜란으로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은 파괴됐다. 이후 성벽의 문루를 복원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읍성 철거정책으로 다시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사라졌다. 어둠이 내린 성벽을 따라 조명이 켜져 있어,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튿날 오전에는 소싸움박물관·와인동굴 등 여러 명소를 둘러보려고 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문을 열지 않은 곳이 있어 여의치 않았다. 청도 유등지에도 들러봤지만 철 지난 연꽃은 대부분 시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청도에 있는 사찰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간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 4년(664년)에 원효대사(617∼686년)가 토굴로 창건한 사찰이다. 흥덕왕 3년인 828년에 흥덕왕의 셋째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수도한 후 진표대사(眞表大師)로부터 법을 받고 백련암·옥련암·은적암·목탁암·운주암을 창건하는 등 사찰을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일주문을 지나 적천사 목조 사천왕의좌상을 둘러봤다. 이곳 사천왕상이 유명한 것은 다른 절의 그것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버티고 선 모습과는 달리 다소 해학스럽고 친근한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천사 사천왕의좌상도 눈을 부릅뜨고 발로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은 다른 절의 그것들과 다를 바 없으나, 얼굴은 험상궂은 표정 대신 미소를 머금은 듯 정감 어린 모습이다. 이 같은 표정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복식의 묘사가 치밀한데다 균형 잡힌 형상이 다른 절의 사천왕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더욱 눈길을 끈다. 1981년 6월 사천왕의좌상 보호각 보수공사 중 사천왕상 속에서 사리·경판·의류·다라니 등의 복장품과 복장기 등이 발견돼 제작연대를 알 수 있게 돼 사료적 가치를 더 하고 있다. /글·사진(청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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