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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어떻게든 살려내라"했던 후원자 이건희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 회장, TV모니터로 작업하는 백남준의 후원자

백남준, 日 TV대신 삼성전자 고집하며 동반성장

이우환 등 현대미술가 지원한 애호가

세계적 수준의 삼성미술관 리움 열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 중인 백남준의 ‘나의 파우스트-자서전’ /서울경제DB




“백남준의 모든 치료는 삼성이 책임질 테니 어떻게든, 반드시 백남준을 살려내야 합니다.”

지난 1996년 4월 초 뉴욕의 백남준(1932~2006)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자격으로 IOC 개최를 앞두고 LA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회장은 “어떻게든 백남준을 살려내야 한다”며 동양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치료제를 미국으로 보내 즉시 조치를 취하게 했다. 삼성 뉴욕지사 직원들을 병원으로 보내 의사에게 “지금부터 백남준의 모든 치료는 삼성이 책임질 테니 어떻게든, 반드시 백남준을 살려내야 한다”면서 “매일 직원이 2명씩 상주하며 모든 것을 돕겠다”고 했을 정도다.

이 회장은 미술애호가이자 든든한 예술후원자였다. 특히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예술가 백남준과의 인연이 각별했다. TV를 예술 재료로 삼은 백남준과 삼성전자가 동반 성장했기 때문이다. 1984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김창열의 집에서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의 소개로 백남준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인사를 나눴고 이후 홍 전 관장의 주선으로 1987년 신라호텔에서 백남준과 이 회장이 처음 대면했다. 당시 백남준은 어디서든 헐렁한 흰 셔츠에 멜빵, 중국제 찍찍이 신발 차림이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백남준은 인사 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더니 화려한 넥타이를 매고 돌아와 “우리나라 경제대통령을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매지 않을 수 없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회장이 “그러면 우리 모두 넥타이를 풀자”고 응수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날의 속 깊은 대화를 계기로 백남준은 삼성전자의 공식 후원을 받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1,003대의 TV모니터 설치작품 ‘다다익선’ 등 대형 작품을 제작해냈다.

한번은 백남준이 해외 미술관 전시 때 삼성전자의 TV모니터라 화재 위험에 취약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 백남준의 기술조력자였던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화가 난 백남준이 일본제(소니) TV와 삼성 TV를 나란히 놓고 화재 모의실험을 해 전혀 부족할 것 없다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고 회상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2000년 2월11일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첫 기획전이자 아시아인의 구겐하임 첫 개인전으로 ‘백남준의 세계’를 열었을 때도 백남준은 소니사의 TV 300대 무상지원을 마다하고 삼성전자 TV를 사용했다. 호의에 대한 보답처럼 백남준은 199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선보인 클래식 자동차 32대로 이뤄진 설치작품 ‘20세기를 위한 자동차’를 삼성으로 보냈고 이는 현재 용인 삼성교통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백남준은 1995년 3월 호암재단에서 수여하는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상을 받았다.

삼성전자의 후원을 받은 TV모니터 1,003대로 이뤄진 백남준의 ‘다다익선’.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의 ‘다다익선’. 1,003대의 TV모니터를 탑 모양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삼성전자는 초기 제작을 비롯해 이후 생산이 중단된 노후 모니터 320대를 교체해 주는 등 각별한 지원을 제공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 회장과 예술가의 인연은 백남준뿐이 아니다. 생존작가 중 세계적으로 명성이 가장 높은 이우환(84)의 해외전시에서도 삼성은 제일 큰 후원자였다. 이 회장의 삼성은 2010년부터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아시아 미술을 위한 예술펀드를 제공해 전문 큐레이터를 확보하게 했다. 이는 이듬해 이우환의 대규모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의 동력이 됐다. 이 회장과 이우환은 서울사대부고 동문이라는 인연도 있다. 이 회장이 13회, 이우환이 8회 졸업생이다. 이런 인연이 아니어도 이 회장은 고도의 정신성을 시각예술로 풀어내고 자연과 작품, 공간과 인간의 관계성을 통한 공존과 조화를 보여주는 이우환의 작품세계에 깊이 공감하는 애호가였다.

이 회장이 예술계에 기여한 최고 업적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건립이다. 부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세웠으나 서울에서 멀어 접근성이 낮았던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 이어 한남동 자택 근처에 삼성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국내 최고의 사립박물관이자 최고의 현대미술관인 리움이다. 리움은 스위스의 마리오 보타, 프랑스의 장 누벨, 네덜란드의 렘 쿨하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각각 디자인한 3개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한국 전통 도자기에서 영감을 얻고 현대미술의 첨단성을 표현한 건물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 우리 고미술품과 근현대 미술품, 외국 현대 미술품을 다양하게 소장한 곳이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을 당시 영부인들의 첫날 만찬 행사가 리움에서 진행됐다.



삼성문화재단은 국보 133호인 ‘고려청자동화연화문표주박모양주전자’ 등 국보 17점과 보물557호인 ‘신라시대 금귀걸이’ 등 보물 10점을 보유하고 있다. 재단이 아닌 개인으로는 이 회장이 국보 30점과 보물 82점, 홍라희 전 관장이 보물 5점을 각각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삼성미술관 리움 전경. /사진제공=리움, ⓟKyung Sub Shin


이 회장과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의 맏딸인 홍 전 관장의 결혼은 정략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여기에도 미술이 가교역할을 했다. 홍 전 관장은 공부도 잘했지만 미술에 대한 재능이 남달라 서울대 응용미술학과(현 도예·공예·디자인학부의 전신)에 입학했다. 3학년이었던 1965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입선했는데 수상자로서 매년 국전을 관람하는 이병철 창업주에게 전시회를 안내했던 것이 이 회장과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홍 전 관장은 1995년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맡았고 이후 2004년 개관한 리움까지 이끌며 부동의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위’ 인물이 됐다.

이 회장 부부는 미술후원자이자 컬렉터로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과시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매년 선정, 발표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에는 이들 부부가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 아트뉴스는 이 회장 부부를 “한국의 국내외 현대미술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컬렉션을 소장하고 리움을 통해 서울을 국제적 문화도시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소개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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