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 등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였다. 나라의 힘이 약했으니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일컫는 ‘간어제초(間於齊楚)’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선왕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문공에게 있어 최대 과제는 국가의 생존이었다. 방법을 고민하던 문공은 세자 시절 만난 적이 있는 맹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때 맹자가 제시한 답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無恒産者 無恒心)’는 것이었다. 서민들의 삶을 안정시켜 줄 생업(恒産)이 없으면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바른 마음(恒心)도 없다는 말이다.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맹자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을 겪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항산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장에서 나온다. 이는 광복 이후 우리 경제의 궤적만 살펴봐도 이해할 수 있다. 70여년 동안 경제가 고속성장하면서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국민들의 삶이 개선됐다. 걱정스러운 점은 최근 들어 성장률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저성장은 이제 뉴노멀이 됐다. 특히 경제의 기초체력이라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 추락은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1980년대만 해도 연평균 9%에 달했던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7.2%, 2000년대 4.4%, 2011~2017년 3.1%로 떨어진 데 이어 이제는 2%도 위협받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오는 2033년에는 잠재성장률이 아예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의 안이한 시각이다. 정부는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이것은 과연 맞는 말일까. 얼핏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가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동원할 수 있는 토지·노동 등 생산요소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좋은 사례다.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1%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이후 완연한 회복세를 타면서 2017년 1.72%, 2018년 2.08%, 2019년 2.13%까지 높아졌다. 10년 만에 무려 2배나 높아진 것이다. 조세감면과 규제완화 등을 통해 투자를 활성화하고 생산성을 높이자 경제가 활력을 되찾은 것이다.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10배 이상 큰 미국이 이렇게 반등하는 것을 보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책에 따라 잠재성장률 둔화 폭을 줄이거나 증가세로 돌려놓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대응 자세다. 문재인 정부는 성장보다는 분배·공정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배 아픔’만 해소되면 다 같이 못살아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코로나19 사태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기업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내놓는 정책마다 기업에 부담을 주는 것투성이다.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이른바 ‘기업규제 3법’을 기어이 통과시키겠다고 나선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경제단체장들이 모두 나서 심각한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와 여당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겠는가.
지금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는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사회초년생 4명 가운데 1명은 실업자 신세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정부 정책을 바꿔야 한다. 1980년대의 운동권적 시각에 갇혀 기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부작용을 초래할 정책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청년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쯤 해서 이념의 색안경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것만이 성장률을 회복하고 청년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길이다. cso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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