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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업고 '레디 고우'…사진 한 장이 굉장히 강렬했죠"

[인터뷰]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 김광보 연출

한국 첫 女영화감독 박남옥 조명

"편견에 맞서 도전하는 인간 그려

자신의 삶 되뇌어 볼 좋은 기회"

창극·무용단·국악관현악 컬래버

위축된 공연계에 "힘내서 해보자"

국립극장의 연말 기획 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통해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삶을 조명할 김광보 연출이 7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작품 연출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오승현기자




“한번 시작해 보입시더. 레디 고우!” 낭랑한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진다. 배우의 연기를 진지하게 주시하는 감독의 등 뒤엔 태어난 지 백일 된 아기가 업혀있다. 가부장적 분위기가 견고했던 1950년대, ‘여자는 자고로…’라는 사회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인이 있었다. 아이를 둘러업고 제작비를 구하러 다녔고, 자기 집에 세트를 지었다. 직접 밥 지어 동료들을 먹여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고상한 예술 아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삶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국립극장 기획 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통해서다. ‘아프레걸’은 6·25 전쟁 이후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당대 신조어다.

그동안 20여 편의 작품을 함께 하며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풀어내 온 김광보(사진) 연출과 고연옥 작가가 또 한 번 힘을 합쳤다. 이번 작품이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뇌어 볼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김 연출을 연습이 한창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딸(이경주)을 업고 있는 박남옥. 박 감독은 영화 ‘미망인’ 촬영 당시 태어난 지 백일 된 딸을 업고 현장에 나서기도 했다./사진=이경주 제공


박남옥. 김 연출에겐 낯선 이름이었다. 남긴 영화라곤 역시나 생소한 ‘미망인’이라는 작품 한 편뿐이고, 이마저도 흥행에 실패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평소 여성 서사에 관심 많던 고 작가의 소개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김 연출은 드라마틱한 박남옥의 일생에 매료됐다. 김 연출은 “아기를 업고 영화를 촬영하는 박 감독의 사진 한 장이 굉장히 강렬했다”며 “이 분의 예술이란 것이 고상하고 특별한 게 아닌 생활과 맞닿은 무엇이라는 게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극 중 박남옥은 이렇게 말한다. “난 뭐 음청난 예술 할 생각 읎어예. (중략) 피비린내 나는 땅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 모습 이왕 한번 자세히 들이다 보자 싶어가 영화로 찍을라칸다 카면 느무 그창한가?” 여자가 어떻게, 애 엄마가 어디… 무수히 따라붙는 세상의 편견에도 박남옥이 힘차게 ‘레디 고우’를 외쳤던 건 영화를 특별한 무엇이 아닌 삶 그 자체라고 봤던 신념 때문 아니었을까. 김 연출은 새로운 세상을 연 여성, 도전하는 한 인간의 삶의 태도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울림이 되기에 충분해보였다”고. 그는 박남옥이 영화를 촬영하는 현재 시점과 과거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영화 ‘미망인’을 극 중 극으로 함께 펼쳐낼 계획이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박남옥(왼쪽 세번째)에게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담뱃불을 붙여주고 있다./사진=이경주 제공


이번 작품은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9년 만에 한 무대에 오르는 합동 공연이기도 하다. 장르적 색깔이 강한 각 단체의 장점을 전체 스토리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체 300여 명의 합동 공연 ‘극장 앞 독립군’을 지휘하기도 했던 김 연출은 “세 팀이 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인 만큼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접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며 “창극단이 전체 드라마를 이끄는 가운데 무용단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극적인 장면을 표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주는 국악 관현악에 기타·드럼 등 밴드를 더해 가져가고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나실인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김 연출은 ‘극장 앞 독립군’ 작업을 함께했던 나 감독에 대해 “대본 이해력이 뛰어난 작곡가”라며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 가슴에 와 닿는 좋은 음악을 기대해달라”고 강한 신뢰감을 표했다.

국립극장의 연말 기획 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통해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삶을 조명할 김광보 연출이 7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작품 연출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오승현기자


그 시절, 여자가 영화 한 편 찍는 게 그리도 힘들었다. 제작비 부족에 촬영은 수시로 멈춰 섰고, 후반 작업과 개봉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2020년, 공연 한 편 올리는 게, 관객과 만나는 게 기적인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김 연출은 “모두가 힘든 시기 ‘내 삶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라며 “식상해도 ‘힘내서 해보자’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온갖 시련에도 “안 된다는 말,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내한텐 된다는 거 보다 안 된다는 게 훨씬 많거든”이라고 말하며 힘차게 달려나간 박남옥. 그녀의 강인한 에너지는 오는 23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박남옥 역은 국립창극단 이소연, 객원 배우 김주리가 맡는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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