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애국심과 신앙의 힘으로 ‘경제 전쟁’에 맞서자는 내용의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베개 밑에 달러나 유로화·금이 있다면 은행에 가서 리라화로 바꾸라”고 국민들에게 촉구했다. 당시 미국과의 외교 갈등에 따른 무역 제재로 터키 화폐 리라의 가치가 하루에 23%가량 급락하는 등 금융위기에 직면하자 ‘애국 마케팅’을 들고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스탄불 환전소에는 리라를 달러로 바꾸려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터키 최초의 리라화 즉 ‘오스만 리라’는 1844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도입됐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한 1923년에는 ‘터키 리라’가 등장했다. 리라는 고대 로마의 중량 단위인 ‘리브라(libra)’에서 유래됐다. 이탈리아의 화폐 단위도 유로화 출범 전까지 ‘리라’였다. 터키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1997년 500만 리라 신권을 발행해 세계 최고 액면의 화폐 기록을 깬 데 이어 1999년에는 1,000만 리라까지 선보였다. 리라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없는 통화’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결국 터키는 2005년 화폐 단위를 100만분의 1로 낮추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최근 리라화 가치가 연일 폭락하고 있다. 13일에는 장중 1달러당 14.75리라를 기록해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터키 중앙은행이 지난 9월 이후 3개월에 걸쳐 기준금리를 19%에서 15%로 내린 것도 영향을 줬다. 최근 앞다퉈 돈줄을 죄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터키는 시중 통화량을 늘리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금리는 만악(萬惡)의 부모”라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나 홀로 금리 인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21.31%까지 치솟아 인플레이션이 서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키고 있다. 당국의 비상식적인 정책에 반발해 “우리에게 밥을 달라”는 시위도 잇따르고 있다. 어디서나 경제 원리를 무시한 지도자의 아집이 국민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도 선거 앞 무분별한 돈 뿌리기 경쟁으로 인플레를 자극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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