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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고 불태워도…다시 일어선 인간의 자화상

■ 정현 개인전 '시간의 초상'

버려진 철길 침목 소재 군상 등

시련 이겨낸 인간의 정신성 표현

30년 걸친 작품 100여점 공개

12월4일까지 성북구립미술관서

성북구립미술관 거리갤러리에 선보인 조각가 정현의 신작 '무제'. 철길의 침목을 재료로 한 작품이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철길 아래 깔려, 내달리는 기차에 밟히며 오랜 시간 견뎌온 침목(枕木). 낡고 닳아 초라하기 그지없는 침목도 한때는 향기 짙은 나무였다. 제 몫의 일을 마치고 버려진 침목을 일으켜 세운 이는 조각가 정현(66)이다. 두 침목 사이에 나무 하나를 끼워 넣은 단순한 형태지만, 이것은 혹독한 시련 후에 다시 일어선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침목이 버틴 시간은 스스로를 벼리는 시간이었다.

성북구 성북로의 성북구립미술관 앞 외부 전시장인 ‘거리갤러리’에 정현의 침목 군상(群像)들이 늘어섰다. 2000년대 초반부터 침목 작업을 시작한 작가가 팬데믹 시기의 고민을 담아 제작한 신작이다. 사람의 형상으로 봤을 때 몸통에 해당하는 가운데 부분을 평소의 목재 대신 금속 소재로 바꿨다. 밖에서 아무리 후려치고 때리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성, 그 빛나는 지점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북구립미술관 거리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조각가 정현의 침목 군상. /조상인기자


거리갤러리에서 만난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지는 성북구립미술관. 이곳 전관에서 정현의 개인전 ‘시간의 초상: 정현’이 오는 12월 4일까지 열린다. 미술관 학예사들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작가 작업실을 “샅샅이 뒤져 끄집어 낸” 1980년대 후반의 초기작과 미공개작, 거친 매력이 살아있는 드로잉 등을 보는 재미가 탁월하다. 30여 년에 걸친 작품 약 100여 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친 작가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90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만져질 듯 생생한 사실적 묘사에 뛰어난 조각가였지만, 귀국 후 선보인 그의 작업은 살과 근육을 모두 버린 채 뼈대만 남긴 선조(線彫)였다. 평론가들은 자코메티와 비교하며 실존주의 경향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실존주의라기보다는, 실존 속에서 본질을 꺼내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 작업실에서도 사용하는 선반형 앵글 형태를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와 시기별 작품 변화의 양상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브론즈가 화장한 얼굴이라면 석고는 사람의 맨 얼굴”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미공개 석고 작업들은 내밀한 매력을 내뿜는다. 참회하듯 무릎꿇고 흐느끼는 인간의 형상부터 재료의 물질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다양한 두상까지 시기별·소재별로 음미할 수 있다.





정현의 작품은 언제나 ‘사람’을 향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이 사람 형상을 보여주듯, 인간이 인간을 빚는 것은 원초적 본성에 가깝다.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주제를, 가장 조각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재료는 침목을 비롯해 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과 석탄처럼 버려질 법한 허름한 것들이다. 작가는 기교는 최소화 한 채 물질성 그 자체를, 시간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최대한 끌어내고자 한다. 거칠고 오래된 재료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시련을 겪은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작가의 말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정현 '무제'


석탄 찌꺼기 격인 콜타르로 유리에 슥슥 그린 드로잉에서는, 면류관을 쓴 예수 형상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한 것 같은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전시를 맡은 김경민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작품의 앞뒤면을 두루 감상할 수 있게끔 벽에 끼워 설치한 덕도 있다.

지난 2019년 강원도 산불 현장에 찾아가 “속수무책 다 타버린 잿더미에서 무작정 작업실로 끌고 들어온 나무들”은 설치작업으로 부활했다. 시커멓게 탄 나무들 틈에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 느껴진다. 실제 잿덩이가 된 나무 끝에 작은 못을 박아뒀다. 타고 무너져 내려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성이 여기서도 빛난다. 전시장에서 나오는 길에 만나는 다소곳한 입상(立像)은 작가 자신과 꼭 닮았다. 관람객 또한 수십 여 출품작 중 어느 한 두 점쯤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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