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은 1월 화물운송사업을 하는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CJ대한통운이 단체교섭을 거부하면 부당노동행위가 된다고 본 것이다. 판결에 따르면 원청기업은 택배기사들의 기본적 근로 조건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법상의 사용자다. 이로써 택배기사들도 근로 3권을 확보해 근로 조건을 향상할 수 있게 됐다.
이번 판결은 법적·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택배기사들은 자영인으로서 집배점과 위수탁계약을 체결한다. 제3자인 원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법원은 근로자가 아니어도 근로 3권을 보호할 필요성이 있으면 노조법상의 근로자로 인정했다.
비(非)근로자를 노조법상의 근로자로 인정해야 하는 상대방은 노무를 제공받는 곳이며 이 사건에서는 집배점이다. 따라서 원청에 택배기사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주장을 한다면 이는 법률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번 판결에서 법원은 법 적용자가 아니라 법을 만드는 입법자의 역할을 했다. 이 경우 헌법상 ‘법치국가’가 아니라 ‘법관국가’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진다.
판결에 나오는 ‘실질적 지배력’은 일본 아사히방송 사건에서 일본 최고재판소가 사용한 개념으로 파견관계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적용한 법적 도구다. 일본 아사히방송 사건에서 방송국 스태프들은 방송국에 강하게 종속됐다. 아사히방송 사건은 협력 업체 파견 근로자들로 구성된 노조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 사건으로 우리나라 원하청 간 단체교섭에는 적용하기 힘들다. 이번 사건처럼 원청과 사용종속관계나 근로관계가 없는 택배기사에도 이 논리를 적용한다면 파견법과 노조법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이 사건에서처럼 6개의 제한된 의제에 대해 교섭하는 것을 넘어 택배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수료도 단체교섭 대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실질적 지배력설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실질’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모호하며 구체적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질’ ‘실체’ ‘본질’과 같은 용어는 다의적이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철학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명사는 잘못하면 해석자의 주관적 생각, 이데올로기, 정치적 신념을 집어넣어 사건을 처리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이 사건은 택배기사들의 근로 3권 제한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기본권 충돌 문제다.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할 것인지 여부가 핵심이다. 그럼에도 택배기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관적 가치를 법원 판단에 주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배점에 택배기사의 노조법상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자로서 근로관계가 없는 원청을 단체교섭 당사자로 확대하는 것은 법률 해석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다.
근로관계가 없는 당사자들에게 파견관계에서 사용되는 논리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법 질서도 혼란에 빠진다. 최근 법원이 전산관리시스템을 지휘명령권의 행사로 인정한 후 기업이 외부 노동력을 이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여기에 더해 자영인과 단체교섭까지 해야 한다면 우리 경제의 활력이 심각하게 떨어질 수 있다. 자영인들의 보호로 인해 노동시장과 재화시장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
법원은 자신들의 주관적 가치를 판결에 집어넣어 ‘법조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자영인 보호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법의 이름으로 보호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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