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이 내세운 세 번째 하원의장 후보인 톰 에머(62) 원내 총무(수석부대표)가 선출된 지 몇 시간 만에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당내 강경 우파들의 반대에 부딪힌 결과다. 유례 없는 하원의장 공백·의회 마비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이스라엘·우크라이나 등에 대한 군사 지원안 처리는 물론 연방정부의 셧다운(일시적 업무 중단)을 막기 위한 본예산 협상 역시 계속 난항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24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공화당은 이날 오전 비공개로 의원총회를 열고 하원 의장 후보에 출마한 8명의 의원을 대상으로 표결을 실시했다. 총 5차례의 투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에머 총무가 최종 하원의장 후보로 당선됐다. 그러나 직후 에머 총무는 그를 단독 후보로 두고 실시한 당내 투표에서 하원의장 당선 정족수(재적 의원 433의 과반)인 217표를 확보하지 못했고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이 해임된 3일 이후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 짐 조던 법사위원장에 이어 세 번째로 나선 에머 총부까지 줄줄이 낙마하며 미 하원 혼란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원인은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내분이 격화하고 있는 데 있다. 이날 에머 총무 호명 투표에서 공화당 내 친(親)트럼프 강경 우파 20여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현재 하원은 공화당(221명)이 민주당(212명)에 근소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당내 5명만 이탈해도 하원의장 선출에 필요한 표를 확보하기 불가능한 구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같은 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에머는 공화당 유권자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며 “에머같은 RINO(Republican In Name Only·허울뿐인 공화당원)에게 투표하는 것은 비극적인 실수가 될 것”이라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폴리티코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에 전화를 걸어 에머 총무에 대한 반감을 표했다”고 전했다.
에머 총무는 미네소타주에 지역구를 둔 연방하원 4선 의원으로 보수 성향 공황당 내에서 온건파로 분류된다. 에머 총무는 동성 결혼을 성문화하는 것을 지지해왔으며 연방정부의 셧다운을 막기 위해 지난달 임시 예산안 편성에도 찬성했다. 결정적으로 2021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뒤집기 시도에 가담하지 않아 당내 극우 강경파들과 척을 진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첫 후보였던 스컬리스 원내대표 역시 당내 후보로 선출된 후 당내 극우 강경파들의 반대 속에 후보직을 내려놨다. 두 번째 후보였던 조던 법사위원장은 하원 본회의 3차 표결까지 갔지만 당내 온건파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초유의 하원의장 공백 사태가 20일 넘게 이어진 가운데 공화당 내 갈등이 사그라들지 않아 의회 파행은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에머 후보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마이크 존슨(루이지애나) 의원 등이 하원의장에 계속 도전할 의지를 보였지만 당내 소수 강경파들의 비토권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현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지원과 국경 통제 강화, 중국 견제 등에 쓰기 위해 마련한 1050억 달러(약 141조 원) 규모의 안보 예산안 처리와 정부 임시 예산안 종료 시점인 11월 중순 이후 적용할 2024 회계연도 본예산 협상 역시 무기한 미뤄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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