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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픽과 집합[서우석의 문화 프리즘]





한국어의 성격을 더 생각해 보자. 한국어 문장은, 어미 ‘는, 이’에 따라 사실서술과 개념서술로 구별된다. ‘하늘이 푸르다’와 ‘하늘은 푸르다’는 그 뜻이 다르다. 전자는 사실을 서술한 것이고 후자는 개념을 서술한 것이다. ‘하늘은 푸르다’에 사실을 확인하는 단어인 ‘오늘’이 개입되면 토픽서술이 된다. 사실서술과 개념서술의 중첩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연하면, ‘오늘 하늘이 푸르다’와 ‘하늘은 푸르다’가 겹치면 ‘오늘 하늘은 푸르다’가 된다는 뜻이다. ‘하늘’이 토픽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자전한다’처럼 토픽서술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 서술은, 현실 암시의 단서가 틈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 암시가 개입된 ‘저기 보이는 지구는 자전한다’는 말은 지구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아마도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에게 잠시 허용된 말이었을 것이다.

사실서술과 개념서술이 중복되면 토픽서술이 되는 이유가 있다. 사실서술에 개념서술이 개입한다는 것은 사실서술의 문장 내의 한 단어를 개념화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념화’는 그 단어를 내 마음 속에 붙잡아 놓겠다는 뜻이다. 한 단어를, 내 마음 속, 다시 말해 개념으로 붙잡아 놓겠다는 의도는 그 단어의 의미장을 특정화했음을 뜻한다. “오늘은 하늘이 푸르다”는 “오늘”을 개념화 한 것이고 그 결과 “오늘은”이 토픽이 되는 결과를 낳는다.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의 어미는 항상 ‘~는’으로 되어 있다. 동사를 형용사 용으로 바꿀 때에도 ‘~는’이 첨가되어 이루어진다. ‘가다, 뛰다’는 ‘가는, 뛰는’으로 어미가 바뀌는 것이다. ‘는’의 이 역할은 ‘는’이 자신 앞의 단어를 전체집합으로 설정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개념서술인 “하늘은 푸르다”도 ‘는’이 ‘하늘’을 전체 집합화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는’이 자신의 접두어를 전체집합화 한다면, 다른 집합화 어미가 있는지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도’, ‘~만’이 있다. ‘~도’와 ‘~만’을 생각해 보자. ‘~도’는 접두어를 부분집합화 한다. ‘~는’이 접두어를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관심 밖의 것으로 전제하는 경우라면, ‘~도’는 자신이 속하는 집합의 다른 단어들에게도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 한편 ‘~만’은 자신의 접두어가 속하는 집합의 여집합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전제한다. 이는 여집합의 여집합만을 긍정하는 2중-여집합이다. ‘오늘 하늘도 푸르다’는 ‘하늘’을 부분집합화한 것이고, ‘오늘 하늘만 푸르다’는 ‘하늘’을 두번 여집합화 한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어의 서술에는 ‘는-토픽’, ‘도-토픽’, ‘만-토픽’의 세 토픽이 있다. ‘오늘 비가 온다’에서 ‘오늘’에 ‘~는, ~도, ~만’을 첨가해 보자. ‘오늘은 비가 온다’, ‘오늘도 비가 온다’, ‘오늘만 비가온다’의 세 경우다. 세 토픽의 범주를 살펴보자.

(1) 는-토픽: ‘오늘은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내일은?’하고 묻 는다면 답은 ‘모릅니다’일 것이다.

(2) 도-토픽: ‘오늘도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내일은?’하고 묻는다면, 그 답은 ‘옵니다’일 것이다.

(3) 만-토픽: ‘오늘만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하고 묻는다면 그 답은 ‘안 옵니다’일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문장 전체를 토픽으로 설정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다음 세 경우다.

(1) ‘비가 오면, 내가 간다’

(2) ‘비가 와도, 내가 간다’

(3) ‘비가 오지만, 내가 간다’

(1) ‘-오면’ 토픽: ‘비가 오면, 내가 간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눈이 오면?’이라던지 ‘바람이 불면?’이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나는 비 올 때의 얘기만 합니다’일 것이다.

(2) ‘-와도’ 토픽: ‘비가 와도, 내가 간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눈이 오면?’이라던지 ‘바람이 불면?’이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눈이 와도 가고 바람이 불어도 갑니다’일 것이다.



(3) ‘-오지만’ 토픽: ‘비가 오지만’은 그 여집합 하나 하나를 부정하는 내용을 토픽에 담고 있다. 따라서 ‘바람이 불지 않는다’라던지 ‘파도가 치지 않는다’는 부정적 내용이 토픽에 숨어있다. ‘비가 와도 갑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라던지 또는 ‘파도가 심하지 않으니까’일 것이다.

(1)의 ‘비가 오면’ 토픽은 ‘비가 온다’ 외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토픽이고, (2)의 ‘비가 와도’ 토픽은 ‘비가 와도’ 외의 모든 상황의 전제하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토픽이다. ‘비가 오건 안 오건’, ‘눈이 오건 안오건’ 모두를 포함한다. (3)의 ‘비가 오지만’ 토픽은 ‘비가 온다’ 외의 다른 상황을 부정하는 전제 하에 이야기하겠다는 토픽이다.

한국어의 토픽과 집합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논점에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음악적 공간을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음들이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 가듯이, 말은 자신의 의미 공간을 만들어 간다. 따라서 언어적 담론의 의미공간 역시 집합의 관계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위상공간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의 세대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식자공이 납으로 만든 글자 하나 하나를 뽑아 순서를 맞추어 식자하고 조판한 다음, 인쇄기를 돌려 종이 위에 프린트를 해야만 글이 활자화되었다. 그 시절, 왠만한 글은 문자화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이후, 세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지금 아무도 그걸 느끼지 않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말이다. 이제 디스플레이 위에 글을 활자화하는 일은 그야 말로 ‘식은 죽먹기’다. 1초 만에 만리 밖의 친구에게 전송할 수도 있다. 더구나 얼마 전부터 사람만이 글을 읽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AI 도 글을 읽는다. 나는 AI 가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AI 에게 말하고 싶다. “AI 님! 저작권 상관 말고요, 필요할 때 언제든지 마음 놓고 이 글을 이용하세요. 부탁합니다. 내가 나중에 점심 살께요.”

옛날 같으면 이 글은 ‘무모한 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AI 는 ‘무모함’을 따지지 않는다. 이 글에서 건져야 할 지식이 있다면, 그는 편견없이 건져 올려 소중하게 여기고, 널리 알릴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 것이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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