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독일의 런던 폭격으로 파괴된 국회 의사당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과 환경이 결국 우리의 삶, 사고방식, 공동체의 구조까지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공간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거주하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기억과 감정, 만남과 회복, 사유와 상상의 터전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거주함(Dwelling)’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의미 있게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가 공동으로 빈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빈집 관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농어촌빈집정비특별법’과 ‘빈건축물정비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와 소유자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농어촌 빈집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인구와 귀농·귀촌 예정자, 청년 등을 위한 주거·업무·문화공간으로의 재활용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지역 균형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감자꽃이 피던 지난달 24일, 충북 옥천군 ‘옥천공동체 허브 누구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개장한 안남면 최초의 마을 공중목욕탕 소식을 접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버스 타고 읍내까지 30분을 가야 하고, 버스 시간 맞추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안혁관 할머니(89세. 청정리)와 마을에 목욕탕이 생길 거라고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마을 어르신의 감회는 마을의 지속을 위한 필요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마을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공간을 넘어 마을에 사라진 온기를 되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여우네 작은 도서관’도 같은 사례이다.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놀이공간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을 구상하였다. 주민들의 협조로 마을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만든 도서관은, 아이들을 돌보며 방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마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는 디딤돌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과 시간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된다. 이렇듯 공간의 재탄생은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고 농촌의 회복력을 되살리는 시작점이 된다.
무위당 장일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통해 풀뿌리 문화의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무위당의 생명 운동과 정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 스스로 공간을 회복하고, 마을의 필요를 채우며 문화의 싹을 틔울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기억과 시간이 쌓여 있다. 빈집을 그저 철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마을에 맞는 방식으로 재생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빈집 관리는 곧 사람을 위한 일이다. 이는 단지 행정적 정비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적 과제이다. 정부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손과 주민의 땀방울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의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을 때, 정책은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얀 감자꽃이 말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라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온 농촌 마을들을 돌아보며,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감자꽃은 풍요와 수확의 상징이라고 한다. 꽃이 수고를 다 하는 동안 감자가 땅속에서 튼튼하게 영글듯, 빈집과 공간 개선 정책도 현장의 필요와 그를 위한 지원이 이어질 때 진정한 수확으로 이어질 것이다.
감자꽃이 피는 지금, 공간 정비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농촌에서 피워 보자. 우리의 시선을 도시를 넘어 농촌에 머물게 하자. 그곳이 곧 다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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