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관세전쟁의 1라운드가 끝난 것 같다. 예측 불허의 트럼프 대통령 성격을 생각하면 앞으로 또 무슨 상황이 생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일단 일본, 유럽연합(EU)과 같이 상호관세 15%로 막아서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3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투자금 마련, 투자금 운용에 대한 이견 조율, 그리고 앞으로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되는 방위비 문제 등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우리나라 기업이 다른 주요국과 거의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올 4월 2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부르며 국가별 상호관세를 발표한 후 세계 각국은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4개월이 지나 일단락된 지금 돌아보면 큰 틀에서 3개의 그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그룹은 우리나라와 일본, EU같이 대미 흑자 규모가 크고 미국과 이해관계가 깊어서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선 국가들이다. 이들은 4개월 가까운 협상 끝에 미국에 대규모 투자와 에너지 수입이나 공동 개발을 약속하고 상호관세를 낮췄다. 두 번째 그룹은 중국처럼 미국에 대해 역으로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희토류 수출제한 조치를 내리는 등 직접 맞대응을 하는 경우이다. 사실 중국은 미국 무역전쟁의 주적이어서, 이 같은 중국의 대응은 미국의 또 다른 커다란 보복을 불러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 외로 미국은 중국에 대한 상호관세 부과를 연기하면서 진지한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오히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은 시리아(상호관세율 41%), 미얀마(40%), 라오스(40%) 같은 나라들이었다. 이 제3 그룹 국가들은 국내 사정이 복잡해 미국과의 협상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결과를 공정성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경제 규모가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국가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나. 실제로 남아프리카의 조그만 국가 레소토는 트럼프 대통령이 소위 ‘해방의 날’에 상호관세율 50%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자 주력 산업인 섬유공장의 해외 주문이 끊어져 경제가 휘청였다. 레소토는 리바이스·캘빈클라인 등 미국 의류에 들어가는 섬유제품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10% 정도 되는데 미국 제품은 생활 수준에 맞는 것이 없어 수입이 미미하기 때문에 대미 흑자 폭이 컸던 것이 문제였다. 이처럼 트럼프의 관세정책에서 공정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고 그 잣대 또한 정교하지 않아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하기 십상이다.
트럼프 대통령 이전의 국제무역은 세계무역기구(WTO)라는 다자간 무역협정 체제에서 이뤄졌다. WTO는 국가 간의 무역장벽을 없애고 세계화된 자유무역을 촉진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일관되게 추진한 방향이었다. 그런데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 무역 현장을 완전히 바꾸려 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30년을 이어온 WTO 체제의 종식을 선언하고 새로운 질서는 ‘트럼프 라운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의 이익 최우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3세계 국가들을 홀대하고 중국에 대해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힘이 없는 제3세계 국가들은 무시해도 되지만 중국은 이미 막강한 힘(기술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잘못하면 미국에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 관계에서 ‘힘의 논리’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트럼프 시대에 우리가 취할 태도도 분명하다. 힘이 없으면 무시받으니 힘을 키워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협상 타결 후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발언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사실 이번 한미 협상에서도 ‘조선 산업’이라는 우리의 힘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힘’은 과학기술력과 산업 경쟁력에서 나온다. 트럼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이념보다도 중요한 현실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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