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청소년에 국한됐던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의 접종 대상을 남성으로 확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유일하게 남성 접종을 지원하지 않고 있는 오명을 벗어야 한다는 의료계의 요구에 여야 정치권 모두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도 포함됐던 만큼 신속한 법안 통과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2일 국회와 의료계에 따르면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HPV 국가예방접종 대상을 남녀 구분 없이 26세 이하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내용 등이 담긴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22대 국회에서 비슷한 법안이 벌써 네 번째 발의된 것으로, 이번 발의는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HPV 백신 지원 확대는 지난 대선에서 양당의 공통 공약이었다. 이 대통령은 여성 청소년에게 무료 지원되는 HPV 백신을 남성 청소년까지 확대하고 예방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양질의 백신 전환을 검토하겠다고 공약했다.
자궁경부암의 원인으로 알려진 HPV는 항문암·두경부암·구인두암 등 남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성관계를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효과적인 예방 전략이다. 남성은 여성 대비 HPV에 대한 면역원성이 낮아 전염 가능성이 더 높다. 국제학술지 란셋 글로벌 헬스는 전 세계 15세 이상 남성 3명 중 1명 꼴로 HPV에 감염돼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남아 대상 HPV 백신 접종을 지원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다.
실제 대만은 올 9월부터 중학생 남아까지 9가 HPV 백신을 지원하기로 했다. 현재 OECD 회원국들 중 여성에게만 HPV 백신 접종을 지원하는 국가는 한국, 일본, 튀르키예 단 3곳 뿐이다. 하지만 튀르키예도 연내 남녀 대상 접종을 시작한다고 발표해 이제는 한국과 일본만 남은 상태다. 다만 일본은 예방범위가 한층 넓은 9가 백신을 지원하는 반면 한국은 만 12~17세 여성 청소년과 만 18~26세 저소득층 여성에 한해 2가 또는 4가 백신 접종을 지원하는 데 그치고 있다. 2016년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을 통해 만 12세 여아 대상 무료 접종을 시작한 이후 10년간 남아 지원 확대 요구가 이어져 왔지만 뚜렷한 진척은 없었다. 이에 따라 국내 남아의 HPV 백신 접종률은 상당히 저조한 수준이다. 지난해 질병관리청 초·중학교 입학생 예방접종 확인사업에 따르면 2011년생 여아의 HPV 백신 1차 접종 완료율은 79.2%인 반면 같은 해 출생 남아의 접종 완료율은 0.2%에 그쳤다.
의료계에서는 HPV 예방을 위한 국제적 흐름에 발맞추고 성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다. 대한부인종양학회, 대한요로생식기감염 등 6개 유관학회는 지난해 “HPV 관련 질환 예방을 위해 성별에 상관없이 9~26세 사이에 백신 접종을 권고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도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국회 복지위는 2025년도 질병관리청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HPV 국가예방접종 사업의 남아접종 확대 및 9가 전환을 위해 총 278억 9100만 원 증액을 의결했지만, 국회 예결위 심사 및 본회의 의결 단계에서 반영되지 못했다. HPV 백신 접종 대상을 확대하는 안건은 올 6월 질병청의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도 올랐다. 그러나 예산이 확보되지 않는 한 내년도 기약하기 어렵다. 이마리아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HPV 백신의 전체 접종률을 높이는 것이 집단 면역 형성의 핵심”이라며 "HPV 백신 도입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나라는 남녀 접종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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